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1)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1)


스파르타와 코린트와 메가라는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에게 악의 축이었다.

코린트인들은 스파르타로 달려가 아테네의 개입을 규탄했다. 아테네를 성토하는 대열에는 메가라 사람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아테네가 통제하고 있는 시장과 항구들에서 부당하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부터 아테네에게 불만이 많았던 아이기나가 메가라의 뒤를 이었다. 이 와중에 코린트 출신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있던 포티다이아에서 아테네의 통치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아테네는 포티다이아를 봉쇄하는 조치로 맞섰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세계를 향해 다가오는 전운이 나날이 크고 짙어지는 모습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전면전의 발발을 두려워하기는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동맹국들을 자제시키는 한편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할 의사가 있음을 피력했다. 전쟁에 이르는 마지막 빗장을 열어젖힌 주인공은 페리클레스였다. 그는 메가라와 타협할 뜻이 없음을 단호히 천명했다.

아르키다모스는 아테네로 사절단을 파견해 어떻게든 파국만은 면해보려고 했다. 스파르타의 사절단은 메가라에 대한 불리한 대우를 명시한 법령을 철회할 것을 아테네에 제안했다. 페리클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메가라를 향한 비난의 수위를 오히려 높였다. 메가라가 성역인 엘레우시스를 이기적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비난의 골자였다. 그는 메가라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외교서한을 스파르타로 띄움으로써 기존의 강경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스파르타가 먼저 전쟁을 도발했다는 통념이 상당히 잘못된 시각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인들은 영국이나 미국의 관점에서 서술된 서양사를 공부한다. 영국, 특히 미국은 자국을 자유로운 민주정인 아테네에 비유하고, 소련을 전체주의적 군국주의를 채택한 스파르타에 견주는 방식으로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진영 간의 이념전쟁을 치러왔다. 따라서 아테네에게 유리한 일은 키우고, 불리한 사건은 감추는 미국식 춘추필법이 기승을 부린 것이 당연했다.

과거 소련이 뒤집어썼던 오명은 이제는 중국으로 향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필자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가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꼭 평화적 해법만을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섣불리 갖지 말기를 독자들께 특별히 당부하는 바이다.

사절이 피살된 사건이 개전의 결정적 구실 역할을 한 사례는 역사상에 허다하게 존재한다.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부근에서 살해당한 일은 몽골이 여몽 전쟁을 개시하는 빌미가 됐다. 당시의 압록강 유역이 여진족이 주로 활동하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범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단지 고려옷을 입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침략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일이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터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입장에서는 제법 합리적이고 인도적 역제안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안테모크리토스에게 휴대시켜 스파르타로 보냈다. 그런데 안테모크리토스가 라케다이몬으로 가는 도중에 피살되었다. 아테네는 범인들이 메가라의 사주를 받았다고 단정하고는 메가라 측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초강경 법령들을 통과시켰다. 아테네가 취한 제재조치에는 어떤 메가라 사람이든 아테네 땅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즉시 사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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