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3)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3)

팔라스의 아들들은 아이게우스의 정적으로 그를 해칠 음모를 늘 획책해온 터였다. 이들이 아이게우스의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팔라스의 아들들은 무려 50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혈연으로 묶인 친형제지간이 아니라 의형제로 맺어진 정치적 동지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산달이 되자 아이트라는 아들을 낳은 다음 갓난아이에게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외할아버지 핏테우스는 테세우스의 교육을 콘니다스에게 맡겼다.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를 보살피고 가르친 콘니다스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테세우스가 강인한 육체와 용감한 정신에 더해 지식과 지혜마저 두루 겸비한 엄친아로 자라난 데에는 콘니다스의 공헌과 노고가 분명 컸을 것이다.

테세우스가 무거운 바위를 단숨에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자 아이트라는 아들을 운명적 장소로 데려갔다. 친부가 남긴 징표가 숨겨진 곳이었다. 아이트라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테세우스에게 이제껏 감춰온 출생의 비밀을 알려줬다.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가 감추고 간 칼과 가죽신을 정성스럽게 수습해 챙겼다.

이때 테세우스는 어떤 충격을 받았을까?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커다란 실망감을 맛보았을 개연성이 짙다. 왜냐면 핏테우스는 테세우스를 트로이젠의 수호신인 포세이돈의 아들로 선전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좌절감은 생부에 관한 소식을 알게 됐다는 기쁨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두 가지 귀중한 선물을 주었다. 칼과 신발이었다. 칼은 무력을 상징하고, 신발은 속도를 나타낸다. 테세우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 힘과 빠르기를 세상을 향해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면 신의 아들에 못지않은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자리로 다시금 돌아갈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테세우스 같은 자부심 강한 청년에게 그러한 야심은 결코 터무니없는 목표가 아니었다.

독립된 자아는 영웅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구성요소이고, 독립된 자아를 확보하려면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필요하다. 테세우스는 외조부와 어머니가 간곡히 권유한 안전하고 검증된 바닷길 대신에 위험과 고난으로 가득 찬 미지의 육로를 택하는 것으로 낯익은 과거와 단절을 꾀했다.

그리스는 국토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처럼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더구나 예전에는 도로망의 상태도 몹시 열악했다. 발칸반도로 진격했던 히틀러의 기갑부대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지경이었으니 테세우스가 살았던 시대야 오죽 엉망이었겠는가? 따라서 육지와 가까운 바다로 가는 것이 빠르고 편했다.

이쯤에서 한번 본질적 질문을 던져보자. 영웅은 어떤 사람인가? 동어반복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개념을 규정하자면 필자는 영웅은 영웅적 행동을 즐겨 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웅적 행위들 가운데 으뜸은 강하고 거친 적들과 싸워 이기는 일이다.

힘이 곧 정의인 시대였다. 힘이 곧 정의라고 믿는 자들의 대부분은 땅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설쳐대고 있었다, 트로이젠에서 아테네로 가는 육로는 이렇게 강하고 거친 것에 더해 악하기까지 한 자들로 차고도 넘쳤다. 한마디로 손에 쌍권총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미국의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비열하고 흉악한 무법자들 천지였다. 그들은 예의와 정직, 정의감과 인정머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자들이었고, 다른 사람의 선의를 다른 사람의 약함의 표시로 받아들여 더 잔인하고 악독하게 굴기 일쑤였다.

한때는 이곳에도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던 시절이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이곳에서 활개 치던 악당들의 대부분을 소탕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이미 추억 속의 인물이 되었고, 이 위대한 영웅의 정의의 주먹질을 용케 피해나가 생존했던 자들이 슬그머니 돌아와 제2의 헤라클레스를 꿈꾸는 이 젊은 청년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훗날 테미스토클레스가 마라톤 전투의 주역인 밀티아데스의 업적을 질시와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우러러보았듯이 헤라클레스의 명성과 무훈을 능가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헤라클레스를 넘어서는 최고의 용사가 됨으로써 자신도 어엿한 신의 아들로 대접받고 싶다는 욕망과 열정이 그를 길목 도처마다 강도와 산적들이 우글거리는 땅으로 인도해갔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는 육촌형제지간이였다. 쉽게 풀이해 설명하자면 테세우스의 외증조부와 외증조모가 헤라클레에게는 친증조부와 친증조모가 됐다. 영웅들 사이에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혈연관계는 당대에 본인이 지어냈거나, 아니면 후대에 그 자손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독자들께서는 참작해주시기를 바란다.

이 두 영웅이 진짜로 친척이었는지는 본질이 아니다. 핵심은 테세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따라잡기 위해 고난과 위험을 기꺼이 자초했다는 데 있다. 그는 칼과 가죽신만으로는 아버지로부터 정당한 자식으로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고귀한 신분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힘에는 힘으로 맞서고, 덕에는 덕으로 화답한다는 행동방침을 기본적 처세수칙으로 정한 다음 테세우스는 아버지가 있는 아테네로 가는 장도에 드디어 올랐다.

‘탈리오의 법칙’은 피해자가 입은 것과 똑같은 정도와 범위의 피해를 가해자에게 돌려준다는 뜻으로 흔히 동해보복법으로 번역되어왔다. 성경에 쓰여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대표적 사례다. 고조선의 팔조금법에 명시된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도 이에 해당한다. 근대적 사법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미개한 고대사회에서 어쩌면 이것은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정의구현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의구현에 나선 테세우스의 첫 번째 희생자는 페리페테스였다. 페리페테스는 에피다우리아를 지나가던 나그네들을 걸핏하면 몽둥이로 때려죽여온 악명 높은 살인마였다. 테세우수는 페리페테스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은 다음 그걸로 몽둥이로 흥한 자, 몽둥이로 망함을 증명하였다. 그는 이 피 묻은 몽둥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무기이자 상징물로 삼아 두고두고 사용하게 된다.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죽인 후에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님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위압감과 공포심을 준 일을 벤치마킹한 셈이었다.

이스트모스에서는 시니우스를 처치했다. 시니우스는 팽팽히 당겨진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행인들을 묶었다가 소나무들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리는 잔인한 수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수시로 찢어 죽이곤 했다. 테세우스는 그 방식 그대로 시니우스를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시니우스에게는 사납고 흉악한 아버지와는 다르게 착하고 참한 페리구네라는 이름의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테세우스는 페리구네를 집요하게 설득해 잠자리를 함께했고, 그로부터 열 달 후 페리구네는 멜라닙포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단군신화를 해석할 때 우리는 곰은 곰을 숭배하는 부족을, 호랑이는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삼은 부족을 각각 이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테세우스의 경우에도 독법의 기본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페리페테스는 몽둥이를 주무기로 사용하는 부족을 의미할 테니, 테세우스가 그 부족을 굴복시켜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고서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켜보자.

크롬뮈온에 당도한 테세우스는 파이아라는 커다란 암퇘지와 마주쳤다. 파이아는 힘세고 잔악무도한 괴수였으나 테세우스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파이아는 멧돼지만큼이나 성질이 포악하고 제멋대로인 여자 강도였다고 한다.

테세우스는 메가라에서는 스케이론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스케이론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테세우스가 스케이론을 제거함으로써 메가라를 오가는 통행의 안전과 통상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엘레우시스에 다다른 테세우스는 케로퀴온과 목숨을 건 레슬링 시합을 벌였다. 케로퀴온이 시합에서 패배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경기에서 이긴 테세우스는 패자의 생명을 거두고는 다음 목적지인 에리네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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