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인간 : 하나님 나라의 기이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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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이것은 내 개인적인 소회에 불과하다.

천국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이상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약간의 들뜬 열기와 두근거림, 이어서 밀려드는 낯섦과 두려움. 돌이켜보면 그 혼란스러운 감정은 정확한 반응이었다. 천국을 그저 이상향으로 정의하기에는 무언가 개운치 않은 점이 있다. 거기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실상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인'이었다. 물론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었던 일이며, 그렇기에 내겐 '신앙의 기원'이라 할 만한 기억이 없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던 때부터, 그러니까 명확한 첫 시점 없이 신앙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회심이나 결심같은 종교적 충격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환경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나는 완성된 테니스공의 안쪽에서 태어난 것과도 같았다. 잘 마감되어 닫혀있는 세계의 주민에게 그 바깥 세상이란 한낱 풍문이거나 과장된 상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이란 한계를 모르고 튀어올라 반짝이는 것인 까닭에, 나는 머리가 큰 언젠가부터 신앙의 기원을 찾아 낑낑대며 거슬러 오르고자 했다(돌이켜보건대 칸트가 이성의 한계와 월권, 그로부터 비롯되는 오류들에 대해 힘주어 했던 이야기는 정당한 것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말을 하지 못했을 때도 내게 신앙이 있었을까? 스스로 선택하지 않인 신앙의 길이 정당한가? 믿음의 비자발성을 인식하고 있는대도 신앙이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단지 신앙심이 떨어졌거나 시험에 들어 있을 뿐인가? 혹은, 이 모든 게 사실 '매트릭스'이거나 '트루먼쇼'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은 없는가?

거슬러 올라간 길의 끝에서는 넘어설 수 없는 단단한 벽과 반복해서 만났다. 그러나 몇 가지 오래된 이미지(장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이것이 내 신앙의 뿌리 즈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부로 판단된다. 모태신앙이라는 경험적 한계를 초월해 단언하고자 하는 이성의 욕망을 최대한 자제한 결과 나는 '실제로 발견 가능한'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 앞에서 진군을 멈춘다: 엄마 따라 구역예배 가는 길에 보았던 해바라기 무리의 흔들거림, 일요일 아침 만화가 보고싶어 교회를 가지 않으려다 쫓겨나서 쏟아지는 폭우 속 울며 두드리던 초록색 철문, 찬양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는 엄마의 얼굴, 새벽예배 따라 처음 나서 만난 캄캄하고 차가운 공기, 그리고 여름성경학교에서 매번 부르던 노래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아, 하나님 나라. 정확히 그게 문제였다. 내가 아는 한 신앙에서 가장 문제적인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내 가장 오래된 이미지들이 그리는 선을 따라가다 보면 전부 천국의 개념과 만나게 된다. 구역예배에 참가한 가정들은 서로의 불행과 행복을 나누며 천국의 약속을 확인했다. 일요 아침 만화보다 교회가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축복받고 이 다음에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눈물은 일그러진 현실의 애환 너머 약속된 천국이라는 '가나안 땅'에 대한 감동과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잠자고 싶은 욕구를 이겨내고 꼬박 새벽예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결국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결부되어 있었다. 여름성경학교에서의 노래는 이 모든 이미지들을 한번에 압축하면서도 동시에 그 의미를 풀어헤쳐서 보여준다.

내 생각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는 흔히 통용되는 천국 개념의 문제적 성격의 가장 극단적인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설교 시간에, 구역예배 시간에, 신도들 간 대화의 시간에, 행복한 시간에, 힘든 시간에 하나님 나라 그러니까 천국은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물론 기성 교회의 해석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견해들도 있으나, 어쨌든 요점은 앞의 대중적 판본이 기독교인 대다수 삶의 방식에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들 그 해석에 따라 말하고 정당화하며 살아가고 견뎌내는 중이다.

요컨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곁가지 이야기들을 쳐내고 나면 신앙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으로 천국 개념이, 그리고 거기 결부된 사후세계의 약속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천국이 없다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 기독교인이다." 천국의 약속이 없을 때도 사람들에게 과연 뜨거운 신앙이란 것이 가능하겠는가? 적어도 내가 수 년의 세월 동안 접해온 기독교 세계에서 구원이란 결국 천국의 입장권에 불과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소용 없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종대왕이, 이순신 장군이, 안중근 의사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어린 신도들의 '순진한' 질문은 신학의 핵심에 정확히 육박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임사체험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경청하곤 했다. 정말 매혹적인 세계였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바에 따르면,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낙원이자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지이다. 그것은 신앙의 근본적인 보상이자 목적이다. 천국에 다녀왔다는 사람들은 아주 화려한 묘사들을 곁들이는데, 길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갖가지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고 사방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다고 한다(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종류의 보석들을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 찬란한 동산에 모두가 자신의 크고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있다(천국의 땅은 얼마나넓은 것일까). 더욱이 누구도 슬프지 않다. 분노도 고통도 눈물도 없다. 미움 의심 시기 질투 다툼 부정적인 일 하나 없다. 대신 기쁨과 화평, 사랑만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우린 춤과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라 한다. 지옥의 끓어오르는 참담함과 비교한다면, 천국의 대기에 가득한 평화와 환희란 그 어찌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니겠는가(사실 지옥에 대한 묘사도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어린 나조자도 천국에 대한 이와 같은 찬미에서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이곤 했는데, 단순히 묘사가 비현실적이고 터무니 없다는 둥 해서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천국의 실재성을 제법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확히 그 확신에 있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재한다고) 상상해보니 정말 기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지상의 인간들은 꿈꾸고 욕망하고 웃고 울고 화내고 사랑한다. 감정은 높거나 낮고 진하거나 옅으며 끊임없이 변해가고 뒤섞인다. 머리 속에선 이성이 굴러가는 소리도 들린다. 사람들은 우주를 머릿속에 넣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한히 흐르며 요동치는 존재의 물결은 제 아무리 악마라도 어찌 하지 못할 것만 같다("cogito ergo sum"). 이렇게 모두가 포옹하거나 싸운다. 협상하거나 돌아선다. 찌르거나 찔린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때도 있다. 그럴 때 그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이 어리지 않은 시선은 없다. 무표정한 얼굴에도 표정은 살아 꿈틀거린다. 사람들은 언제나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며, 정확히 이 부산스러움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가.

즉, 변화무쌍하며 무수한 색깔로 끓어오르는 인간의 '인격'이야말로 그 존재의 중핵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인격이 인간을 정의한다는 사실을, 즉 인간이란 몸도 마음도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추함도 성스러움도 역겨움도 모두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천국의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아름답다. 오로지 아름답다. 울지 않을 것이고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똥이나 오줌도 안 싸지 않을까? 구토하는 일도 없지 않을까? 성욕도 없을까? 천국의 사람들은 섹스를 하지 않겠지? 아, 그들은 웃기만 한다. 즐거워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만 한다.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아무런 '배설 작용' 없는 인간들의 모습이란 너무나도 기괴해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의 인간에겐 인격이 말소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 존재에게 눈물과 웃음은 독립적인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고통과 쾌락의 밀접한 동형성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울 수 있는 인간의 웃음이란 슬픔 자체가 없는 인간의 웃음과 같은 것일 수 없다. 하지만 임사체험으로 천국을 다녀왔다는 이들의 견문록에 따르면 인간성의 변형과 개조는 천국의 영주권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심사/조치 사항인 것 같다. 그렇다면 천국의 입주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이다. 그들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무수한 색깔과 크기로 변해가는 인격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아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순간 사람들의 본질은 순식간에 바뀌어 버리는 것만 같다. 지상에 육신을 놓고 가니 본질의 변화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영혼이란 독립적 실체가 정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일종의 기억 상실, 아니 인격과 본질의 부분적 변질 속에서도 천국의 '나'는 지상에서의 '나'와 동일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곳에 있는 것은 여전히 '나'일까? 만일 아니라면, 제기랄, 그 모든 게 애초에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웃기만 하는 사람들. 울지 않는 사람들. 기쁘기만 한 사람들. 화내지 않는 사람들. 마치 환각제나 최음제를 먹고 난 후의 모습 같다. 인격의 말소는 신의 정책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종의 입국 조건으로서) 행해지는 시술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천국의 환경이 너무나도 선하고 아름다워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본성 자체의 변화 없이 후자의 경우가 가능하기는 한가?) 인격이 말소된 사람에게도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그의 단독성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천국에 올라가 사별한 이를 만났다고 해서 지상의 '나'가 그러할 것처럼 기뻐 얼싸안고 울면서 웃는 게 가능할까? 이것이 나를 소름끼치게 했던 것의 정체이다. 고통과 슬픔에 둔감하고 기쁨 만을 아는 존재들만큼 인간을 소스라치게 놀라도록 만드는 것은 없을 것이다. 천국에서 그렇게 변화된 '나'는 더 이상 지금의 나와 동일한 인간이라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말이 적확하다.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또한 어렵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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