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年生 한 無名氏 의 日記] 4292年(1959年) 10월 26일 -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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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2.10.26 (10.25) 월요일 (맑음)
아버지는 새벽 2시경에 남의 집 타작하러 가버리고 내가 늦게서야 일어나 아침을 먹고 짐을 추리고 새끼 꼴 준비를 하였서 이럭 저럭 오전을 넘겨버렸다. 점심을 먹고 새끼를 조금 꼬다가 도장이 생겨 성나서 꾸지 않고 그만두고 보리논에 가서 보리골을 바르게 다듬어 놓고 늦게서야 내동 점방에 놀다가 집에 오니 父가 막 욕설을 하면서 화를 내었다. 실은 없는 집안에 불평이 와기 쉽다.

4292.10.27 (10.26) 화요일 (맑음) (흐림)
늦게 학교로 출발해서 갔더니 지각이 아니였다. 학교 수업을 4시간 하고 여전히 걸어오는 경우였다. 나 혼자 걸어오니 심심하기 짝이 없고 성이 왈칵 치밀었다. 이 험악한 세상에 내가 여기에 졸업한들 무엇하겠냐? 돈많이 있어면 대학도 갈것인데 하는 생각이였다. 농사일을 한다 하드래도 힘없는 나였고 그것으로써는 도저히 생활 할 수없음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궁금중에 있다. 늦게서야 집에와 새끼 두동테를 수야 저의 집에서 꼬니 성이 나기 시작했다. 왜 남은 기분이 좋게 일을 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떠오른 어떻한 것 때문에 성이 왈칵 치밀었다니

4292.10.28(10.27) 수요일 (맑음)
새벽 일찌기 父가 깨우시기에 일어나서 이른 아침을 먹고 온종일 보리갈이에 바빴다.

4292.10.29 (10.28) 목요일 맑
오전에는 보리갈이를 하고 오후에는 남의 나락을 묵으러 갔다. 저녁에서 늦게까지 돈 150환에 나락을 묶으로 간단 말인가?

4292.10.30 (10.29) 금요일 (맑)
아침을 먹은 후 풀을 베고 작년에는 장을 담지 못해서 올해는 일찍이 메주를 쑤어서 그것을 찍어주고는 마음이 꽤 좋지 않아 공부도 못하고 해서 당말리 뒷산에 올라가 남들의 벼타작 하는 것을 바라볼 때 나의 마음 한층 더 넓어 갔다. 내가 장차 어른이 된다면 일류 유명한 존재가 못될지언정 부자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졌다. 남들의 타작하는 광경이 곧 나의 희망의 길로 끄는 참다운 등불인 것이다. oo 집에서는 타작을 하느라고 이웃집 아낙네들을 데리고 가서 점심 한끼를 주곤 하지마는 우리를 빼놓았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것인가? 우리가 그전에 밭때문에 싸워서 그러한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도 전에는 타작할때마다 이웃집 어른들 또는 아낙네들을 그렇게 해보았다. 그러나 모든 이것이 나의 교훈거리가 되었다.

4292.10.31 (9.30) 토요일 맑
아버님과 어머니는 남의 품팔이 하러 가고 나는 집을 보게 되였다. 집에서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 한번씩 넓은 들판을 바라보면 마음을 애태운다. 오늘도 서말리 산으로 가서 노루벽에 가니 이 바쁜 농번기에도 불고하고 고기낚는 인이 10명 가량되었다. 그래도 그 고기 낚는 사람도 의식주에 곤란을 느끼지 않으며 이 바쁜때에 잠시도 쉬지않고 일하여도 의식주에 곤란을 느껴 매일 같이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오늘도 이웃집들에서는 타작을 하여 집무덕이와 가락 가마니가 들러오곤 한다. 이것을 볼때 잠시도 놀지말고 열심히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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