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한 자는 누구인가? 척준경 이야기

한국 역사상 최강의 무장을 논하자면 보통 두 사람 정도가 소환된다. 첫째는 당연히 조선 태조 #이성계. 압도적인 활솜씨로 적장을 직접 저격하던 이성계는 전어도와 태조궁이라는, 자신만을 위한 칼과 활을 따로 제작해 사용했다. 쿠데타와 왕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한 탓에 주로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실제 분위기는 우리의 고정관념보다는 말론 브란도가 연기한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에 보다 가까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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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어진>

다른 한 명은 고려 중기의 무장 척준경이다.

이 사람은 전술가도 정치인도 못 되는 분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강력했다.

싸움실력 하나로 여진정벌에서 도합 십수만의 고려군 장병을 구해내고, 여진족의 남하를 막아내 역사를 바꿨으며 일국의 최고 실권자까지 오른 불세출의 전사다.

완안 오아속(금나라 태조 완안 아골타의 형)이 이끄는 여진족의 사투는 척준경 한 사람의 무력에 의해 번번히 좌절되었다. 멸망 직전까지 몰린 여진족은 최강의 전사를 소환했으니...

그는 바로 '사묘아리'다. 불과 17세 때 혼자서 일개 부족을 격파하고 추장의 동생을 생포한 사묘아리는 단 하루에 세 번의 전투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고려의 해군 기지까지 점령했다. 사묘아리는 자신의 강함만으로 고려의 국력을 뿌리채 뒤흔들었고, 전쟁수행능력을 절단냈다. 사묘아리가 동족의 운명을 구원하던 그 날, 공교롭게도 척준경은 전투 현장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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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그려진 사묘아리 상상도>

두 인물이 마주쳤다면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까?

두 사람은 상대가 없는 현장에서 각각 싸움실력으로 영웅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무승부로 끝난 전쟁을 통해 고려와 여진은 서로에게 학을 뗐다. 이렇게 포기를 모르고 정신력을 발휘하는 상대와는 다시는 붙고 싶지 않았다. 이후 세워진 금나라와 고려는 끝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는 땅을 드리겠다고 하고, 금나라는 그 땅은 고려가 잘 관리해주시라며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연출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고려와 여진의 전쟁은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오랜 기간의 평화적 관계를 초반에 흘린 피로 '선결제'한 것이다. 양측 모두에게 과다출혈이었지만 그래서 더 깨끗하게 봉합했다.

여진정벌은 여진의 입장에서는 야만적인 침략이었고, 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금나라 황실이 되는 완안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요나라에서는 여진족이 단결해 10만의 군사를 결집할 수 있다면 천하는 그들의 것이라는 계산을 마쳤다. 이 조건을 마련해준 고려는 금나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요나라가 멸망하는 걸 느긋하게 구경했으니, 거란족의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게 됐다.

요나라는 고려에 양면공격을 해서 여진족의 전선을 두 개로 확장시키자고 절박하게 제안했다. 물론 고려는 요나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금나라에 일러바치기까지 했다.

"후방은 걱정 말고 요나라를 마음껏 털어 잡수시오. 수고!"

덕분에 여진은 안심하고 근거지를 비운 채 요나라 정복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금 황제는 국경의 장수들에게 고려에 먼저 싸움을 걸면 이겨도 죄를 묻겠다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금나라는 제국을 이룬 후 그래도 중원의 황제국이 되었고 고려는 외왕내제(대외적으로는 왕국, 안에서는 황제국) 국가이니 딱 형님 대접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형제관계는 우열은 있어도 항렬은 같다. 이 정도야 고려도 내줄 수 있는 타이틀이었고, 답례로 금나라는 국력이 절정일 때도 내정간섭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성공의 크기를 보면 여진족이 더 큰 보상을 누렸지만 고려에게도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묘한 전쟁이다. 냉정히 따지자면 잘못은 고려 쪽이 훨씬 많이 저질렀다. 2차 여진정벌의 전개과정을 보면 작전이라고 기록된 게 죄다 전쟁범죄 수준이다.

어쨌거나 이 기묘한 전쟁에 척준경과 사묘아리라는, 각자의 조국을 지킨 최강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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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태조 완안 아골타>

철의 제련기술과 전술이 발달하는 과정을 보면 한 사람의 실력이 전투의 판도를 바꾸는 시대를 발견하게 된다. 노, 활과 같은 발사무기의 발사체가 그만한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남성의 갑옷을 쉬이 뚫지 못할 때 중세 서양의 기사와 같은 엘리트 전사가 출현한다. 이들은 전투의 키 플레이어다. 여진 정벌의 총사령관 윤관이 1차 정벌 때 중장갑 철기병 500대 500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수만의 보병을 놔두고 패전을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시대에는 엘리트 전사 단 한 명이 역사를 결정하기도 한다. 척준경과 사묘아리가 그런 인물이다. 십자군 전쟁에는 사자왕 리처드가 있었다(리처드는 살라딘의 성공을 막지는 못했지만.). 무서운 건, 왕을 항복시킨 외척 이자겸과 파트너십을 맺었던 바람에 척준경의 일대기는 고려사 <반역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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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심왕 리처드의 어진(?)>

사관들은 척준경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사서를 썼다. 이성계는 왕조의 창시자인 만큼 과장과 아첨의 여지가 있지만 척준경에게 인정사정이 있을 리 없다. 그의 전공은 과장될 수 없다. 그런데도 기록된 성공한 압도적인 강함은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이다.

척준경은 사회적으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나는 그를 일종의 '스타'로 본다. 그는 군부와 민중에게 가장 핫한 스타였고, 어느 정도는 유명 연예인의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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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라고는 하지만 그는 결국 왕(인종)을 사랑하게 되었다. 척준경은 왕을 위해 한때 국정농단의 파트너였던 간신배 이자겸을 처단했다. 그 후 한 신하의 탄핵에 순순이 응했고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내려놓은 채 양순하게 유배길에 올랐다.

아마도 짜여진 각본이었을 것이다. 인종은 이듬해 그를 고향에 돌려보내 풍요로운 여생을 누리게끔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외척에 시달리던 젊은 왕의 친정체제 확립과 당대 최고 스타의 은퇴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국익에 부합하는 결말이다. 둘 사이에는 모종의 협약이 있었다고 확신한다. 척준경은 실수도 했지만 마지막에는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받아들였다.

이 정도면 공칠과삼을 인정받을만 하다.

척준경의 삶은 남자가 싸움을 지나치게 잘 하게 태어나 난세를 만나면 인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해지는 지 보여주는 일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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