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 태국 정치근현대사 Ver.1 (이벤트: 0.9 스팀달러 받아가세요!)



▲ 내가 사랑하는 야경이 아름다운 태국

안녕하세요 @brianyang0912 입니다.

오늘은 모두가 재미없어 하실,
그런 태국 근현대사 정치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도 아니고 그것도 태국...)

그래도 한번쯤은 나누고 싶네요,

여행가시기 전에 한번씩 읽고 가신다면,
좋아하실 거에요.

재미는 없겠지만,
지루할 수 있겠지만

잘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 !


차크리 왕조

작년에 태국 국왕님이 서거하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좌에 계셨던 왕이며
모든 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셨죠.

일전에 살아있는 부다 라고 불리셨습니다.

그리고 태국 국왕님은 라마 9세 였습니다.
지금 새로 즉위한 국왕은 라마 10세죠.

즉, 차크리왕조의 시작부터 현재의 태국에 이르기 까지,
약 10명의 왕이 즉위했다고 볼 수 있죠

태정태세문단세.... 이렇게 해서 라마 10세까지 오게된거죠

근데 태국은 절대왕정국가는 아닙니다
현재는 입헌군주제죠

1932년부터요!

왕이 실질적인 정치적 파워는 없습니다.
하지만 태국의 정치는 왕실과 때 놓을 수 없죠.
자 이제 시작해보겠습니다!


태국

태국은 1932년에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전까진 씨얌(Siam) 이라는 국명을 썼죠.
왕권통치국가였구요,
실질적으로 왕이 국가 수반이었죠

차크리왕조는 1782년부터 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수도를 방콕으로 세웠죠


▲ 당시 SIam의 영토 (출처 위키피디아 :태국의 역사)

씨암 이전부터 현재의 태국은 외국과 교역을 많이 했습니다
1700년대부터 이미 외국인 마을이 존재했으니 말이죠
지리적 여건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옵니다.
당시 세계는 식민지 전쟁으로 바빴습니다
인도차이나반도도 예외는 아니었죠

당시 시암왕국에겐 세가지가 중요했습니다
(1) 생존 - 식민지화 된 이웃국가들로부터 살아남기
(2) 번영 - 유럽의 산업혁명에 맞썬 무역의 증가
(3) 위신 - 국제사회로부터 한 국가로 인식받기 (Sovereignty)

당시 씨암은 Proactive 한 정책을 펴게 되죠.
수동적이면 식민지화 될 수 있으니까요
주변국가 버마(현 미얀마)를 보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동남아시아 식민지 영토표기 (출처: 위키피디아: 태국의역사)

그리고 나서 아주 활발한 대외정책을 폈습니다.
서방국가와 국제조약을 맺죠
라마 3세때 첫번째 조약을 맺으면서 국가로 인정받습니다.
바로 Burney 조약 (1826년)입니다.
이로인해 대영제국과 씨암은 교역을 하기 시작했죠

두번째 조약은 1855년에 맺어진 Bowring Treaty 입니다
요 조약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조약입니다
즉 불평등 조약이기도 한 이 조약은
다시 한번 시암은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고,
쌀 및 농업 수출국이 되면서 행정체제를 개혁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과 범죄자인도조약을 맺으면서 씨암은 영국인을 체포할 수 없었구요,
영국에게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빡남 사건 (Paknam Incident)는 1893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언뜻 보면 당시 열강들은 다 이런 전략을 썻나 봅니다.

이는 프랑스와 씨암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 사건인데요,
이 싸움의 결과로 씨암은 영토의 일부를 프랑스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도와줄 이유도 없었죠.

이후 당시 왕이었던 라마 5세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라마 5세는 깨어있는 왕이었죠,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유럽의 많은 왕들을 만나고 서양문물을 배우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후, 재정부를 설립해 세금을 걷었고,
외교통상부를 만들었고, 1902년엔 징병제를 실시,
교육과정을 신설했으며, 철도를 건설했습니다
이때 후알람퐁역사가 건설에 들어갑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점,
보시면 아시겠지만 태국은 식민지 통치를 단 한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었일까요?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시죠

(1)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당시 열강들은 식민지 땅따먹기 때문에 바빳는데,
1869년 영국과 프랑스는 조약을 맺는다
이로써 태국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2) 씨암은 국제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았다.
1897년 라마 5세의 첫번째 유럽여행과
1907년 두번재 여행을 통해 유럽 열강의 왕들과 친분을 쌓았다.

예시는, 1899년 만국평화회의 또는 헤이그 회담( 헤이그 특사 사건)에서
당시 씨암은 주권국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출처: 만국평화회의 위키피디아)

당시 만국평화화의는 영국과 러시아 왕의 지인들을 초대해서 만들어진 자리였습니다.
당시 초열강들의 모임이었죠.
당시 러시아는 대표자를 시암에 보내면서 초청을 했습니다.

1917년까지 시암은 중립을 표명했습니다.
전쟁을 할 이유도,
국력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습니다. (서방국에 비하면)

그러다가 후에 1차세계대전 막바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프랑스에서 훈련받은 자국 군인들을 보내었습니다
당시 라마 5세의 정책중 하나는
서방교육을 받고 오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훈련받은 군인들을 보냈죠
즉, 전참국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도 전쟁에 참가하죠.
이것은 큰 기회였습니다. 결국 연합군이 동맹군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이겼는데
씨암은 당시 전쟁 승전국으로 지위가 격상되었습니다
국제연맹 설립 국 중 하나이며, 베르샤유 평화조약에도 참가했죠.

1932년 무혈혁명이 일어나면서
왕권이 타도당했습니다.
왕은 정치적인 권력을 모두 잃고
그냥 국가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죠.

이제부터 군부의 정치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국호가 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위협과 생존 (1930년대)

1차대전 이후, 일본이 인도차이나 대륙까지 넘보게 됩니다.
1938년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로 군대를 움직였죠.

당시 군정부는 국민들을 선동했습니다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찾아야한다
불평등조약으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차아야 한다
제국주의적으로 나가고 있었죠

1939년 9월 5일 태국은 중립을 표명합니다
1940년 6월 12일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와 반침범 (non-encroachment) 조약을 맺었죠
하지만 태국은 일본이 자국 군인을 태국 영토로 들이자마자 일본과 조약을 맺습니다
(A Mutual Recognition on Territorial Integrity - 영토통합에 대한 상호이해조약)

마치, 땅을 잠시만 빌려주면 좋겠다
우리 군사들이 미얀마로 가야하는데 길을 비켜줘라

이때 태국은 머리를 씁니다
일본은 너무 강하고, 이대로 두면 쑥대밭이 될 것 같고
우리도 미얀마로부터 땅을 되찾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럼 일본은 왜 태국을 지나가야했나?

지리적으로 보면 원래 싱가폴로 들어와야 맞았습니다
하지만 싱가폴은 이미 중무장 된 상태였죠.
해상을 통하지 않고 육로로 진군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전세가 기우는듯 해보였죠

1941년 1월 태국은 프랑스에게 전쟁선포를 합니다.
그리고 이전 영토를 찾겠다고 주장을 하며, 인도차이나쪽으로 군사를 이동시켰죠

1941년 2월, 여전히 세계전쟁에 대해선 중립을 지켰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과 또다른 조약을 맺습니다.
양자 조약으로 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군사이동을 통해
미얀마 진군하는 것을 허용해주죠

그리고 1942년 1월 태국은 미국과 영국에 전쟁선포를 합니다
세계전쟁에 참전하게 되죠

당시 태국의 군부정권 총리는 피분 쏭크람 이란 사람이었었습니다

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온 군사 엘리티이자 정치인이었죠
독재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나봅니다

당시 일본이 너무 강했고,
일본군이 영토침범을하려 할때
영국에게 군사원조를 부탁하였지만 무시당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침략하기 하루 전, 태국영토가 위험하다고
SNS를 쳤지만, 그냥 무시해버린거죠

위에 빡남 사건으로 이미 영토를 한번 잃은 태국은
영토만큼은 잃지 않고 싶어했습니다.
자존심이었으니까요.

태-일 동맹의 결과?

하지만, 태국내 다른 세력이 있엇습니다
당시 주영 태국대사는 영국에 전쟁선포를 했지만,
주미 태국대사는 미국에게 전쟁선포를 하지 않고 도와달라고 말한거죠
국가 수반의 명령을 어기고 전쟁선포를 안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세계 곳곳에서 태국인들이 모여
새리타이 운동(Seri Thai Movement)가 일어납니다
전쟁을 원하지 않으며, 일본과 편먹는 것을 멈춰라
일본과 맺은 모든 조약과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전쟁선포는
무효라는 운동을 했죠

이 모든 조약은 국민의 허락없이 한 통치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국-미국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났습니다

연합군의 승리였죠
일본은 패망하고, 태국의 위치는 애매해집니다.
전쟁막바지에 들어가 뭐 하지도 못했는데 전쟁이 끝났고
일본이 패망함녀서 태국도 패전국이 될 위기에 쳐했죠

2차대전이 끝날당시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독립국은 태국 하나뿐이었는데,
당시 인구는 약 1600만명인 작은 국가였죠.

근데 웃긴건,
당시 태국이 전쟁을 선포하던 말던 아무도 크게 신경 안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입장이 애매해졌죠,
나는 전쟁을 한것도 안한것도 아니고,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니고,
주변 식민지 국가들은 아무힘도없고
또 프랑스에겐 눈치도 보이고,
영국에게도 눈치보이고,,
영국은 심지어 전쟁배상금을 내라며
자국 군을 태국으로 이동한다 말했죠

이때, Seri Thai Movement운동을 이용해 미국에게 요청을합니다
우리의 주권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우린 너에게 전쟁선포도 안했다 그러면서 도움을 청했죠
더욱이, 아직 식민지지배가 끝나지않은 시대였습니다.
다시 식민지시대의 영향이 태국까지 미칠까 두려웠고
태국은 작은 국가였죠

여기서 정답은 하나였습니다

바로 UN에 가입을 해야했죠

오직 주권국, 독립국만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거든요
미국은 다행이 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줬습니다.
미국은 영국을 설득해주었고,
마침내 태국은 값싼가격에 쌀을 영국으로 수출해주기로 하고
UN의 55번째 국가로 가입을 합니다

프랑스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희한하죠? 왜냐? 당시 Seri Thai Movement는 프랑스에서도 있었거든요
프랑스도 태국의 지위를 이해해주고 고려해주었습니다.

마지막 러시아는?
예전에 라마5세는 러시아 왕과 진짜 친했습니다
거의 부X 친구인마냥 친했죠
유럽 여행도 사실 러시아의 왕이 주선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다른 열강 왕들과 친해질 수 있었죠

하지만 세상이 변했습니다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펼쳤습니다

태국은 공산주의를 싫어했습니다.
반공산법을 만들면서 공산국과들과 외교관계를 끊어버렸죠
하지만, Prine Wan 이라는 당시 외교부장관은,
러시아의 고르바초프를 만납니다.
단기간 내로 러시아에 자국 대사를 파견하겠다며
외교관계를 맺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장에 고르바초파는 confirmation이 적힌 종이를 들고 들어가며
UN가입국이 됩니다


세계는 변했죠

<외적변수>
UN이라는 체재 아래 세계의 질서가 재편성되었습니다.
승전국들이 이를 만들어갔죠
당시 핵무기를 보여했고, 경제력이 강했던 미국은
브레튼 우즈를 설립하면서 세계 패권국이 되려 합니다.
서방국의 리더로 자리잡았쬬

<내적변수>
상시 Seri Thai Movement (자유를향한 운동)이 일어나면서
시민들의 힘이 강해집니다
당시 Pridi라는 역시 해외에서 교육받은 엘리트가 있습니다
1932년 개혁때 4명중 한명이었죠
그는 피분과도 친한 관계였고, 영국과 미국에 전쟁선포당시 내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선포를 동의할 수 없다며 홀로 사라졌죠.
그리고 그는 해외로가서 Seri Thai Movement를 이끄며, 그 영향력이 컸죠.

그리고 당시 태국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회 인프라가 잘 안되있었고,
국가 경쟁력도 없었죠
시장규모도 작았고, 수출능력도 떨어졌구요

그리고 엘리트 계층들은 여전히 식민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서방국이 전쟁을 마치면서 新식민지 정책을 펼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달랐습니다
세계가 둘로 나뉘었죠


1948~1958 많은 국가와 다자간 동맹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反공산주의 정책을 펴나가죠
전쟁에서 패하면서 정권에서 물러났던 피분이 구테타로 다시 돌아옵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1954년 태국은 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을합니다
쉽게 말하면, NATO와 같은건데, 미국이 주도했습니다.
만약 안보적인 문제가 있다면 다자간으로 해결하자는거죠.


글을쓰다보니 너무 너무 너무 길어졌습니다

옜 기억을 되집어보며 쓰다보니
재밌네요^^
정말 재밌습니다
100명중 한두명정도면 좋아하실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의견을 나누고 싶으신분들은
언제든지 댓글을 달아주세요

다음이야기는 추후에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질문이 있는데, 스팀파워 임대료가 비싼가요?


큐레이팅 시간입니다^^ (0.3 스팀달러 x3)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면 좋겠지만!
아직까진 적은분들이 참여해 주시네요

오늘은 주말이고 하니!
0.9 스팀달러를 드립니다!
총 세분께 0.3 스팀달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더 올려보려 노력하겠습니다 ㅠ)

가장 빠르게 정답을 맞추신 분께 드리는데,
한분이 두개의 정답을 맞추셔도 하나로 인정하겠습니다
즉 0.3스팀달러는 두분에게 돌아갑니다!

자 넌센스 질문입니다

(1)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이제 겨울이 오고나니 동물들도 동면을 하나봅니다
11월에 뱀과 벌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아시는 분은? (0.3 스팀달러)

정답은 본문에 있습니다!

(2) 글을 찾아보면 있는 내용입니다,
Seri Thai Movement를 한국말로 풀면 뭘까요? (0.3 스팀달러)

지금 현재(오늘날) 절대왕정인 국가는? (0.3 스팀달러)

정답이 너무 빨리 나올 경우,

그래도 참여해주시는 모든분께,
0.01 스팀달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약 일정시간 후에 공개와 함께
정답자들께 바로 송금해드리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더 많은 큐레이팅은 #brianyang0912 :)


댓글 ,보팅, 팔로우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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