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D-line] #11. 식물이었으면좋았을까

Screen Shot 2018-04-16 at 11.56.57 PM.png

기독교인이면 한번은 들어봤을 말들 중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신의 명령이 있다. 그 명령은 신이 세상을 다 만든 후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고 그 인간에게만 특별히 내려졌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호모사피엔스 위주의 세계관이고 네러티브지만 그런 것은 일단은 넘어가고. 어제 계속 생각이 들었다 - 정말 생육과 번성을 거듭해 지구상에 꽉꽉 들어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며는 사실 우리는 식물이 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식물에 비하면 동물의 번성이란, 그와중에 인간의 번성이랑 넘나 비효율적인 짝짓기에 의존하고 있잖아! 그것은 인간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신의 효율성을 내포하는 완벽함 이랄까 그런 것과도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외계인들은 모노리스를 만들었다. 어떤 것으로도 상처낼 수 없는 표면을 가진 그 물체는 설계된 역할-유인원을 진화시키는-을 충실히 수행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도 식물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무기물이었어도 괜찮았을거 같다. 인간의 목적은 신을 찬양하는 것이다! 라고 마음속에 꿍한 생각을 품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 신은 인간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자신을 찬양할 것이라고 직접 말한 바 있다.

사실 이 생각들은 1년여전 판례를 우연히 읽게 되면서 시작됐다. 청주지법이 외부 성기 형성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을 바꿔달라는 요청을 허락하면서 내놓은 판결문이었다. 조금만 인용하면,

'바뀐 성으로 살면서 외부성기는 그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혐오감 등을 줄 수 있고 본인에게도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지만, 다양성과 소수자 권익 보호를 논의하는 단계로 진입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의미한 주장이 아니다.

유의미한 주장이 아니라고 근엄하게 표현됐지만 실은 쓸데없는 소리라는 말. 그리고 그 쓸데없는 소리를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집단이 내가 오래 몸담아온 교회인 것이 씁쓸했다. 비슷한 이슈를 다룰 때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운운하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자웅동체였다면 차라리 식물이었다면...하게 된거다. 그런면에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선언이 아쉽다. 남녀를 벗어나는 젠더를 정의하는 순간 '번성'이라는 신의 명령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정 주장이 유의미하지 않게 되듯,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선언을 이제는 남자와 여자 뿐 아니라 그 사이 어디쯤 있는 모든 젠더들까지 창조하셨다고, 그 모두가 광대한 신의 섭리 안에 들어 있을 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Join the conversation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