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중등 교육철학 (스케치) : what should be education?

  1. 피교육자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교육은 실패한다. 모든 교육은 폭력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폭력적'이라는 말은 체벌이나 그런 걸 뜻하는 게 전혀 아니다. 이 말은 교육에는 '강제적' 성격이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해 교육은 기존의 지식 체계를 교란함으로써 새로운 체계로 재편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교육이란 '기른다'는 뜻이다). 교육자가 주도해야 한다. 피교육자의 절대 높이를 끌어올려야만 한다.

  2. 평등한 교육은 있을 수 없다. 교육은 차등적일 때만 평등하다. 눈높이 교육을 집단으로 시행할 때 모순이 생긴다(한 교실에 모아놓고 가르치는 일!). 눈높이가 다 다를 땐, 집단 교육은 누군가를 끌어내린다. 눈낮춤 교육? 이는 교육의 이념에 위배된다. 평가(가령 시험)는 학생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수단일 때만 정당하다. 평가는 줄세우기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허나 지금 평가는 골라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떨어트리기 위한 시험은 곤란하다.

  3. 국가주의를 목표로 교육이 이뤄질 때 문제가 생긴다. 근대교육은 반국가적 주체를 기르길 원치 않으며, (거의) 모든 (제도) 교육에서 국가는 최종선이고, 이를 어길 경우 교육자는 추방된다. 그래서 '의무교육'이라 순화되어 번역되는 compulsory education은 실은 '강제교육'을 뜻한다. 왜 국가가 강제로 교육하는가? 충성하는 유순한 '국민'을 기르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국가에 봉사하는 써먹을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왜 교육해야 하는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국가주의 바깥에서 제시된 적이 있나?

  4. 나는 주입식 교육의 옹호자다. 최대한 집약해서 쏟아내고, 최대한 질문에 응하기. 누군가에게 당하기 싫으면 가하라. 이 비판정신은 내 교습론의 기본전제이다. 절대 높이를 올리려면 바닥의 높이를 일단 제시해야 한다. 높이의 바닥이라 해도 좋다. 인류가 지금까지 도달한 높이! 토론이라든지 PBL(Project Based Learning)은 그 다움에야 가능하다. 물론 순서가 바뀔 수도 있고, 복합적인 방법이 시도될 수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교사는 인류가 도달한 최고 수준을 학생에게 압축해서 전해줄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방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토론이나 PBL은 옳지 않다.

  5. 교육자라면 무릇 피교육자와 관련된 상황에 최대한 대비해야 하며, 모든 질문과 반론에 즉각 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물리 교사가 지리에 답하고, 역사 교사가 수학에 답하고, 이런 것이 가능해야 한다(물론 현실에서 어렵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에, 팀티칭이 필수적이리라). 여럿이 함께하는 상황이라면, 쓸데없는 질문을 잘 차단할 능력도 갖춰야 한다. 가끔 토론 상황에서 뻘한 질문자에게 시간을 길게 할애하는 사회자가 있는데, 모든 참가자에게 아까운 시간을 빼앗는 민폐는 즉시 차단해야 마땅하다.

  6. 초중등교육 말고 고등교육은 어떨까? 준비가 되어있기는커녕 배반이 가속되는 중이다. 자기 전공에 인접한 옆 분야는, 모른다! 그런데도 교육자? 아니, 그저 직장인. 집단이기적이고 유능한 직장인. 정기적으로 등재지에 논문을 제출하는 사무직. 안식년은 좋아라.


지금까지 (명성 60까지는 계속 뉴비라고 우길, 한달 반 된 스티머) @armdown ('아름다운') 철학자였습니다.

팔로, 보팅, 리스팀('팔보리')는 스팀잇 사랑 3종세트('팔보리 3종 세트')입니다.('팔내려'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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