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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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어느 단체 모임에서 함께 떠난 날.


그 날 일정에 제주 4.3 평화기념관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기념관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맨 뒤에서 일행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그 오래된 선입견은 처음 입장한 기념관 내의 짧은 영화 상영에서 순식간에 녹아 버렸습니다. 충격에 가까운 내용을 보고, 일행은 조용히 숙연히 관람 아닌 교육을 이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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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들, 넓은 홀, 칸막이, 각종 조형물로 구성된 기념관 내부는 낯선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제주도에서 육지라 부르는, 한반도 본토의 역사와 분리된 듯한 이 곳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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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요새라 불리던 제주도.
성조기 펄럭이는 미군정 실시.

제주 4.3 사건은 1948년에 일어났지만, 그 출발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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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정 시기와 미국 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대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던 시기에, 3만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희생된 4.3.

7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진실이 얼마만큼 밝혀졌고, 제주도민의 슬픔과 상처는 얼마만큼 치유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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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영상 속 섬 전체가 거의 붉게 물들어가니, 차마 화면을 쳐다보기가 숨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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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평 유치장에 35명 수감.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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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오랜 악몽이 끝나고 난 후, 다시 일어서는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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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투어와 설명을 듣고 나오며,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는, 알고 지내던 제주 토박이 농장 사장님의 툭툭 던지듯 쌀쌀맞은 말투가 떠오릅니다. 가끔 이해하기 힘든 제주 지인들의 쿨함(?)도 함께.

제주 날씨와 환경이 척박해서만이 아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듭니다.

제주도에는 마을에 따라 집집마다 제삿날이 똑같다고 합니다.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가족들이 한 명 이상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당시에 젊거나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도 많았기에, 아직도 제주도민의 현실 속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살아있는 누군가의 부모 형제 남편 등 가족 친지 친구...


언젠가, 제주 시내 한 개천을 가리키며, 제주 지인이 한 말:
당시 저 개천에서 붉은 피가 넘쳐 흘렀다고 들었어.

그저 풍광 좋은 개천으로만 보였던 그 곳.
그런 곳이 그 곳만이 아니겠지요.

잠깐의 관광지 여행, 한달 살아보기 등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조금씩 제주 생활 속으로 스며들수록 내가 알던 제주와 너무 다른 제주의 모습이 보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그런데 어느 순간, 더이상 그들의 역사, 그들의 감정만이 아닌 순간이 다가옵니다. 결국, 나와 우리의 역사, 나와 우리의 일상으로 섞여들어오는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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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니, 하늘과 구름과 갈대가 너무 아름다와 더 가슴이 아려오는 건 왜일까요.

그리고, 그건 단지 '사건'이 아닌데, 왜 '사건'이라 할까요?

또한 영어로는 어떻게 표기할까요?

궁금한 것이 많아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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