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소한 장애] 눈을 감으면 온통 까매요 - 아판타시아(Aphantasia)

Black.jpg

눈을 감으면 온통 까맣습니다. 모두 그렇겠지요?
그런데 눈을 감고 숲을 생각하고 바다를 떠올려도,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도, 매일 치던 피아노를 떠올려도 제 머릿속은 암흑입니다.

저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장애 '아판타시아(Aphantasia)'를 소개하고 싶어요.
이 증상이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작년 동생이 보내준 사진 한 장 때문이었어요.

3f06bb4eff14474259d5ef54b28c982d.jpg

글쓴이의 문체가 감정적이었고, 구체적 내용이 나와 있지 않아 이 글을 보고도 이 증상이 장애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예전부터 이 증상에 관한 고민은 있었습니다. 왜 나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할까? 아빠의 얼굴을 왜 기억하지 못할까? 라는 의문이 있었어요.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남자친구를 앞에 앉혀놓고 눈을 감고 얼굴을 그렸다가, 얼굴이 그려지지 않아 다시 눈을 떠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감고 그려보는걸 반복했던 기억이 나요. 남자친구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저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사물이 떠오르는 것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당연하니까요. 저도 마찬가지로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삶에 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살아가던 중 작년 이 증상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바다가 너무 아름답길래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어요. 한 지인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진을 찍지 않아도 눈으로 기억하면 돼."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 또다시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상상력이 부족해서 바다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바다를 그려보았습니다. 여전히 제 머릿속은 암흑이었고, 다시 좌절하게 되었죠.


문득 이 증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판타시아를 알게 된 것이죠. '아판타시아(Aphantasia)'라는 이름의 유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는 능력을 “판타시아(Phansasia)”라고 부른 데서 착안했다고 하네요. (여러분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낭만적인 능력을 갖고 계신답니다)

인간의 뇌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상을 통해 이미지를 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능력을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상실하여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특정 사물을 이미지로 머리속에서 상상/재현할 수 없다. 본인이 아판타시아에 해당하는지 헷갈려 하는 위키러들을 위하여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재현한다는 의미는 디테일로 꽉 차 있는 실제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어렴풋이, 정확히는 상상하는 순간 실제로 무엇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디테일을 보려고 하면 형체를 잡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시각실인증(visual agnosia)의 하나로, 안면인식장애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장애다.

나무위키에 적힌 짧은 설명을 가져왔습니다. 이 내용이 이해가 될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구구절절 공감됐습니다. 특히 더 와닿았던 부분은 상상하는 순간 실제로 무엇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디테일을 보려고 하면 형체를 잡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라는 대목이었어요.

저 글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면 엄마의 얼굴은 동그랗고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 입이 하나이고 쌍꺼풀이 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엄마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그러면 얼풋 어떤 형상이 떠오르는 것도 같아요. 물론 까맣게요. 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조합하려고 하면, 엄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면 다시 머릿속이 까매져요. 전 단 한 번도 제 상상 속에 무언가를 정확하게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5a07d6a63041d18025dad722.png

아판타시아를 설명하는 사진입니다. 사과를 생각할 때 아판타시아 환자들은 사과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이죠. 저 설명이 맞으면서도,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고쳐봤어요. 다른 아판타시아 환자를 만나보진 못해 단언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저는 사과를 떠올리면 이렇게 된답니다.

f.png


아판타시아의 자료를 찾아보다 파이어폭스 개발자 블레이크 로스가 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I have never visualized anything in my entire life. I can’t "see" my father's face or a bouncing blue ball, my childhood bedroom or the run I went on ten minutes ago. I thought "counting sheep" was a metaphor. I’m 30 years old and I never knew a human could do any of this."

"나는 평생 어떤 것도 시각화한 적이 없으며, 아버지의 얼굴이나 푸른 공, 어린 시절의 침실 또는 10분 전에 뛰었던 뜀박질을 "볼" 수 없다. 나는 "양을 세는 것" 이 은유라고 생각했다. 나는 30 살이며 인간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이 글을 보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도 '양을 세는 것'이 은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양을 세는 것이 은유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것이 장애고, 질병이라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제 단점을 괜스레 이 증상 탓으로 돌려보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옹졸한 마음에 남들은 되는데 나는 안된다고 하니 묘한 상실감도 들더군요.

궁금한 게 참 많습니다. 자기 전에 양을 세면 정말 양이 그려지는 건가요? 양 스무 마리를 세면 정말 목장에 있는 양 스무 마리가 그려지나요? 그럼 더 잠이 잘 오나요? 오래전 봤던 바다의 풍경이 눈을 감으면 그대로 그려지나요? 저는 느껴보지 못했기에 더욱 궁금합니다. 저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도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림을 그릴 수 있으신가요? 저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거든요.

저는 앞으로도 눈을 감으면 온통 까맣겠죠. 한 번쯤은 내 눈으로 그린 숲에 저를 세워보고 싶은데, 그런 일은 불가하다니 조금 속상하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더 자주 눈을 떠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봐야겠어요.

아판타시아는 전 세계 2.5% 정도가 앓고 있다고 해요. 백 명 중 두 명꼴이니 꽤 많은 수입니다. 아판타시아에 대해 찾아보며 알게된 것은 대부분의 아판타시아 환자들이 장애인지도 모른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는 것이에요. 아판타시아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느끼기 때문에 질병인지도, 장애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저도 그렇고요. 스팀잇에도 저와 같은 증상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더 자주 이야기해서 이런 질병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문득 치료법이 나오고, 저도 숲 속에 있는 제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볼 수 있지 않겠어요?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Join the conversation now
Logo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