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우리는 ‘이기는’토론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는 ‘이기는’토론만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토론’을 ‘찬성 또는 반대의 의견을 말하며 논의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좁은 의미의 정의일 뿐이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토론’이란 자신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이와 대립되는 상대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과정을 거쳐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토론이란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의사소통을 결정하는 하나의 방식

때문에 토론 문화는 해당 국가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꽃 피운 나라들은 토론을 의사결정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이를 활용하였다. 🏛

하지만 지난 대선 토론부터 최근 가상 통화에 관한 토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지켜 본 토론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고 논리로 대응하지 않으며 감정적,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 혹은 논리적으로 대하더라도, 자신이 정해 놓은 답을 위한 결과론적인 논리가 있을 뿐이었다. TV토론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에서의 토론 역시 찬반이라는 이분법적 틀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학생이던 시절 우리는 주어진 논제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만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토론 문화가 경쟁만을 위한 이분법적 토론의 틀에 갇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토론 교육의 효과 중 하나가 민주 시민의 양성이라는데, 이와 같은 불통 토론 문화가 어떻게 민주 시민을 양성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현실 사회에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찬반의 입장만 있는 경우는 드물다. 전적인 찬성과 전적인 반대 사이에는 부분 찬성, 부분 반대, 중립 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한 찬반 토론은 하나의 주장이 주어지면 토론이 끝날 때까지 그 주장을 사수해야만 한다. 혹 토론 과정에서 오류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토론자들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의 본질이 상호 존중과 이해, 협력적 민주 소통 과정이라는 것에 있다면 ‘이기고 지는’것이 중요할까?

가장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JTBC '뉴스룸 긴급토론-가상통화, 신세계인가 신기루인가'(2018/1/18)의 토론을 다시 떠올려 보자. 가상 화폐와 관련된 문제가 심각한 이슈로 대두되며, 갑자기 편성된 토론이었다. 때문에 토론에 참여한 패널들의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은 감안하더라도 나는 적지 않은 실망을 해야 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찬반 토론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토론에서만큼은 찬성과 반대라는 대립적 구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누가 찬성한다고 해서, 반대한다고 해서 오거나 오지 않을 미래가 아니다. ‘가상통화, 신세계인가 신기루인가’는 찬성 반대, 혹은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토론 논제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가치 논제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문제이다. 가상 통화의 가치적 측면에 관한 논제를 다루면서도, 찬반토론으로 이어지는 경쟁적 토론 구도를 마련한 토론 주최측의 의도가 궁금하다.

심지어 이러한 경쟁적 토론 구도에 익숙한 사람으로 한 사람만이 자리하며 토론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패널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곤 경쟁적인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때문에 이런 토론에 익숙한 한 사람이 토론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발언 기회를 빼앗을 뿐 아니라, 자기가 정해 놓은 논리 안에서만 이야기 할 뿐, 그 이외의 논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토론에서는 자신의 의견은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인정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토론에서 이러한 장면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미 가상 통화를 ‘악’으로 규정하고 나온 그는, 가상 통화가 화폐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넘어서 이를 시장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논제는 시장화 찬성/반대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떠올려야 한다.

그렇게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패널들은 내내 한 사람의 논리에 끌려 다니다 토론이 끝나고 말았다. 이를 보고 많은 대중은 그가 이겼다 평했다. 토론은 이미 경쟁적인 구도였고, 이 구도에 익숙한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이미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이긴’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악’의 시장에 빠져 재산을 탕진할 어리석은 대중을 걱정해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대표로 싸워준 것이라 여기며 기뻐했다. 역시 미래를 읽는 안목이 있다며 그를 칭찬했다. 하지만 말을 잘하는 것과 미래를 맞추는 것은 관련이 없다. 현재와 과거에 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에서 미래에 대한 예상은 가능하겠지만, 언제나 논리성이 정확한 미래 예측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잘한 것 없는 토론이었다. 민주적 의사소통으로서의 토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언제까지 우리는 토론을 말싸움으로 볼 것인가?
  • 언제까지 우리는 항상 이분법적 틀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 언제까지 우리는 토론의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패자를 조롱할 것인가?

내 의견과 같지 않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토론은 위험하다. 민주 사회의 모습은 ‘나’와 ‘적’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 토론 문화가 그 나라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는 말이 맴돈다.


✳ 블록체인과 가상통화에 대한 토론이었던 만큼, 사실 관계에 관한 문제도 많이 제기되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우리 사회에서의 토론 문화가 단순히 이분법적인 틀에만 갇혀 토론의 본질을 벗어나 있지는 않은가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토론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도, 토론을 바라보는 이들도 토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 더불어 찬성과 반대만이 아니라 부분 찬성과 부분 반대, 중립 등의 입장이 제시될 수 있는 토론 방식,
이해와 협력, 조율이 가능한 유연한 토론 방식,
그리고 상호 존중과 배려가 권장되는 토론을 TV에서도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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