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없는 초고의 용기

열심히 써놓고도 다음날에는 실망스러운 글들이 수두룩하다. 표현이 촌스럽고 짜임새가 느슨하다. 근거는 부족하고 주장은 거칠기만 하다. 심지어 스스로 설계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남의 글을 읽듯이 처음부터 이해의 단계를 밟아야 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텍스트에서 풀려나온 씨줄과 날줄이 손아귀 사이로 와르르 모래처럼 쏟아진다. 통제력과 방향감각의 상실감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 결과 의기소침해 펜을 놓아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억누르고 두 눈은 굳게 감고 나 자신에게 변명을 한다. '시간이 없어서, 좀 더 준비되면, 어차피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에서 써봤자 ... 그러니 오늘은 쓰지 말자. 내일 쓰자.' 물론 다음날에도 쓰지 않는다.

글쓰기에 대한 배신은 이렇듯 비겁하게 자행되어 왔다. 그런데 질투심 많은 글쓰기는 무관심을 참지 못하고 내게 복수하곤 했다. 일상의 파고 속에서 서서히 마음속에 환멸과 우울이 스며들어 쓰고자 하니 막상 글이 입을 닫아버린다. 배설되지 못한 감정의 파편들은 결석이 되어 마음을 찌르고 압박한다. 결국 나는 손을 싹싹 빌며 글에 매달리고 그렇게 굴욕적으로 주종관계가 회복된다. 이렇듯 글쓰기와의 관계는 복고적이고 반동적이었기에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주도적 위치에 선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성이든 감정이든 어딘가에 취해 달려나가다 겁이 나 뒷걸음질치고 그대로 영원할 것만 같은 정체 속으로 빠져드는 식이었다. 포기와 후회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재능도 노력도 의심한다. 그렇다 해도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에 도착증에 발목을 잡힌다.

어찌 해야 하나? 사실 필요한 것은 단 몇 차례의 결단이다. 어디선가 이런 문구를 읽은 적 있다. "형편없는 초고를 끝까지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진정 그것은 '용기'의 일종이다. 과잉과 결여로 삐걱대는 와중에서도 걸음만은 멈추지 않는 일. 부러진 뼈로도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 아무렴 어떻냐는 마음으로, 온갖 과오들로 얼룩진 와중에서도 성큼성큼 진전하는 일. 반복하건대, 필요한 것은 '스스로 미쳤다 생각되는 가속도'를 단 몇 번 체험하는 일임에 틀림 없다. 그것은 불완전함 속에서도 꾸준하게 걸어 뭔가를 해보았을 때의 쾌감을 체험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용기, 용기, 용기, 필요한 것은 단 몇 번의 용기일 뿐이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리라.

p.s. 독일의 철학자이자 현상학의 아버지인 에드문드 후썰의 저작 중 많은 수가 "< ㅇㅇㅇ 입문>"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가끔 후썰이 평생 입문만 했다고 놀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후썰의 학자다운 조심성과 침착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입문' 즉 '초고'라는 의미를 끊임없이 그 자신의 저술에 부여한 것은 어쩌면 그가 지닌 '용기'를 뒤집어진 형태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면서도 꾸준히 길을 걸어나가고 그러면서도 결코과단하지 않는 덕목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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