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법

누군가가 지금 나에게 다시 태어나게 해 준다면 무슨 성별로 태어날 것이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변할까.

어렸을 땐, 아니 지금도 순간순간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싶을 때가 많다. 딸 셋의 장녀로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가 종가집에 대를 끊어버린 죄로 평생을 죄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 순간부터, 여자라서 친구집에서 잘 수 없고 통금시간을 준수해야 할 때부터, 여자라서 안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땅에 여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만약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rbaggo님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계일주를 떠났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남자였다면 어떤 장애물없이 회사에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내가 남자였다면 우리 부모님께 든든한 어깨가 되어 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내가 남자였다면 죽을 것 같은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고, 육아에 대한 책임이 이렇게 크지 않았을텐데 선악과를 따먹게한 여자의 죄값이 진정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한참 어릴 땐 여자니까 배려해 준다는 식의 대우가 무지 싫었던 적이 있었다. 동아리 선배들이 동기들 기합준다고 모두 집합 시켰을 때 넌 여자니까 빠지라고 했을 때 선배들한테 부당함을 따졌고, 사회 초년생 시절 남자 동기생들은 밤새워 일해야 할 때 여자라는 이유로 너는 가서 쉬라고 할 때 괜찮다고 악착같이 버텼다.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거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우기고 또 우기면서 그렇게 버텨왔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배려라도 좋고 차별이라도 좋았다. 아이 키우는데 더 좋은 여건을 배려해 주는 분이 좋고 감사했다. 여자라고 회식에 빠지는 것이 죽어도 싫었는데 엄마라는 이유로 회식에 안 불러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내가 얼마전까지 모신 우리 지점의 대표분은 아이가 셋이셨다. 그 분은 퇴직하고 나가실 때까지 나에게 높은 직위에 올라가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하셨다. 그저 아이 키우는 것이 가장 중한 일이니 혹여 승진이 안 되더라도 너무 마음 쓰지말고 아이 키우는 것에 마음을 다하라 조언하셨다. 승진에 마음쓰며 지냈던 날들이 다 부질없었다 하시며 애 셋 있는 내가 직장 생활 하는데 많이 신경을 써 주셨다.

그리고 그 분은 퇴직하셨고 이제 새로운 분이 오셨다. 이분도 아들만 셋이시다. 그래서 혹시 내 상황을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했다. 하지만 이 분한테는 개인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조직의 성과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만약 개인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개인은 조직을 위해 스스로 알아서 조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그러니 여자들이 육아를 이유로, 여성임을 이유로 직장에서의 배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것을 요구하는 여성근로자를 참으로 한심해 하신다.

내가 비영리집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도 이익을 내야하는 집단이니 조직의 성과가 중요하고 조직의 성과를 위해서는 개인의 상황 같은 것은 배려될 수 없는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회사가 이익을 창출해야하는 조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남자랑 여자는 동일한 출발선에서 출발하지 않지 않은가. 신체적 조건은 차지 하고서도 출산과 양육은 거부할 수 없는 오랜시간 우리의 문화적 산물이지 않는가 말이다. 요즘 그 상사의 눈에 들기위해 어떻게 하면 보고 한번 더 해볼까 눈에 쌍심지를 껴는 남자 동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의 성격상 상사에게 직속으로 보고할 건수가 없는 여성들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일을 하지 않고 있다고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여성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 출산이나 육아를 위해 휴직을 내거나 아이들 병원, 졸업식, 학교 행사 등을 이유로 바쁜 시기에 휴가라도 내게 되면 기다렸듯이 꼭 한마디가 나온다.

여자들은 그래서 안돼.

여성들의 성과는, 일에 대한 태도와 열정은 일반화되기 쉽다. 아주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가. 나도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오늘 이순간 내가 겪고 있는 순도 100% 리얼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할 것이다. 최소한 나로 인해 '여자들은 그래서 안돼'라는 선입견이 우리 조직내에 자라지 않도록 말이다.

언제쯤 우리 사회에서 그러니까 여자는 안된다는 말이 사라질까. 여성에 대한 배려가 또다른 역차별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한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다. 내일부터 시작될 월요일이 참 무서운 지금은 일요일 밤이다.

Cb5z_y_WwAAs46G.jpg

이 한장의 사진이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아 진정 슬프다.

H2
H3
H4
3 columns
2 columns
1 column
Join the conversation now
Logo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