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감정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은 여행기임을 알려드립니다.
유럽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고 두 달이 거의 다 되었을 때였다. 오빠와 나는 이끌리듯 크로아티아의 어느 섬으로 향했다. 섬이라 평지를 기대했는데, 생각한 것과 다르게 100m에 한 번씩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몇 시간을 고군분투한 끝에 나는 참지 못하고 분노의 말이 튀어나왔다.
오르막에 잔뜩 약이 오른 나를 향해 오빠는 조금만 더 가보자며 나를 다독였다. 이미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솟은 나. 폭발 직전 오빠의 얼굴이 보인다.
긴 호흡과 함께 숨을 들이켜고 내쉬어본다. 한결 괜찮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무거운 짐이 가득 실린 자전거에서 내려 두 손으로 질질 끌고 산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먹은 것도 없어 배고프고, 계속 산길을 자전거로 오르니 죽을 맛이다. 땀은 삐질삐질 흐르고, 뱃가죽은 솥뚜껑처럼 홀쭉하다.
큰 도로는 위험해서 산길을 택했는데. 후회막심이다. 척박한 산자락에서 소리를 채우는 것은 우리의 헐떡임 뿐이다. 둘을 제외하고는 물 한 모금 나누어줄 사람 한 명 없구나. 자욱한 나무, 바닥에 가득한 자갈돌. 너희가 밉게만 느껴진다.
결국, 나는 폭발해 버렸다.
힘들어도 잘 참아왔던 나. 처음으로 포기의 말이 터져 나왔다.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 본인도 힘들었다며 한숨을 내쉰다. 머리는 산발에 녹초가 되어버린 우리.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 악몽 같은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선착장을 찾아야 한다.
2시간이면 도착할 테니 조금만 힘내서 거기까지만 가자!.”
나와 오빠는 이 악물고 달리고 달렸다. 섬에 들어온 지 3시간 만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오르막과 길고 긴 사투 끝에 정상에 도착했다. 저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몇몇 건물이 눈에 띈다. 왠지 저기가 선착장인 것 같다. 신나는 마음으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죽어라 올라갈 때는 미워 죽겠더니, 정상에서 내려다본 바다와 섬의 모습이 퍽 아름답다. 순간 이 황홀함에 껌뻑 넘어갈 뻔했으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과 바다를 따라 아래로 향했다. 머리를 스치는 바람이 수고했다며 나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나는 그저 미소로 화답한다. 내리막은 참 빠르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나아갈 때는 죽도록 힘든데, 나락으로 떨어지기는 참 빨랐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 까짓거 신경 안 쓸 거다. 나락이란 것이 나와 어울리도록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에게 물어 배편을 구매할 수 있는 매표소로 향했다. 들어가서 직원에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배편이 있냐고 물어보니 다른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죽자고 달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니. 그럼 자전거를 타고 다시 그 고생길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일단 방법이 없어 섬을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털레털레 매표소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를 가지고 선착장 앞에서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저 멀리 우리와 같은 자전거 여행자들이 보인다.
자전거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있어보이는 자전거, 그 위에 밧줄로 각종 악기와 천 가방을 쌓아 올린 모습. 참으로 요상하다. 심지어 자전거 주인은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이리저리 각자의 악기를 점검하고 있다. 나는 선뜻 말 걸 용기는 내지 못하고 흘낏흘낏 그들을 훔쳐보았다.
오빠와 어떻게 할지 상의하고 있는데 정신은 그들에게 있었다. 그들도 힐끔힐끔 나를 쳐다본다. 내가 쳐다본 것을 그들이 눈치챌까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오빠와 대화를 이어갔다. 일 분 정도가 지났을까 수염이 덥수룩하고 파마 머리를 한 친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그,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내심 저 친구들의 정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 친구들은 눈이 동그래지더니 주변에 함께하는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다. 세상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들. 호의가 고마워 나도 환한 웃음과 포옹으로 답했다. 이 친구들은 각각 다른 나라에서 여행 온 친구들인데 여행 중에 만나 함께 여행한다고 한다.각자의 재능을 가지고 공연을 해 여행자금을 번다고. 이것이 자전거 위에 저글링, 기타, 훌라후프 등 각종 이해할 수 없는 물건들이 올려져 있던 이유다.
처음에 인사했던 친구가 우리에게 함께 여행을 해보지 않겠냐며 제안한다.
난감해하는 나를 등지고 오빠가 덥석 그들에게 말한다.
설렘에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오빠의 눈빛 참 오랜만에 본다. 오빠는 나에게 이 친구들이랑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떠냐며 묻는다.
영어도 못 하는데......”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새로운 것을 늘 두려워하는 나는 겁쟁이다. 새로운 것은 나를 가슴 뛰게 하지만, 딱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두려울 때가 많다. 오 분간 고민했다. 왠지 오빠의 저 눈빛을 져버리고 싶지 않아 함께하기로 했다. 새로운 경험은 나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줄 수도 있으니까. 여행이라는 건, 더 넓은 세상을 향한 행복의 질주니까. 이 세상이 나에게 경험해보라고 주는 일을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날 저녁, 나와 오빠는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그들의 길을 따라 떠났다. 오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내일은 어디에 도착할지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퐁당 하고 빠져든 것.
정해진 삶, 계획적인 삶을 추구하던 나에게 큰 변화가 올 것 같은 느낌. 나는 오늘 그토록 이나 싫어하던 오르막을 이 자전거와 함께 다시 오른다. 둘이 아닌 7명으로. 불만 가득한 얼굴이 아닌, 나지막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ronepv / 사월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