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비전 발표자료 준비하다가(a.k.a. 임상심리 후배님들에게 드리는 꼰대스러운 조언)

내가 일하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1년에 한 번 수퍼비전 비용을 지원해 준다. 8~10만 원 정도 세이브되는 셈이다.

특별히 언제까지 수퍼비전 자료 내라는 말이 없어서 발표 4~5일 전에 보내면 되겠지 했는데, 담당 선생님이 오늘까지 내는 것이라고 해서 콩닥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하루 종일 준비해서 겨우 기한을 맞췄다.


내가 다시 수련생으로 돌아간다면, 상담심리전문가에게 수퍼비전을 열심히 받을 것 같다. 병원에서 심리평가만 하고 심리치료는 하지 않는 임상심리전문가에게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배우긴 어렵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발로 뛰어야 내담자나 환자 보는 눈이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특히 자기가 심리평가한 환자를 꾸준히 치료해 보는 경험이 심리치료자로 성장하는 데 큰 자산이 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원이 말도 안 되는 로딩으로 주말 밤낮 가리지 않고 수련생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심리평가에 들어가는 로딩의 일부를 좀 더 심리치료 쪽으로 옮겨 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터놓고 말해서 임상심리전문가 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채워야 하는 10사례 총 300시간의 치료 경험은, 최소한 심리평가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서 턱없이 적은 게 사실이다.

임상심리전문가의 중심축이 여전히 병원 장면에 있고 병원에서는 정치적 및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임상심리전문가에게 치료 케이스를 잘 안 주려 하는 경향이 있다(안 그런 병원에 계시다면 복 받으신 것.).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학회측에서도 사례 수를 쉽사리 늘리지 못 할 것 같다. 앞으로도.

하지만 이런 추측이 fact에 부합하는 정도가 높을수록 병원에서 일하는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생들에게는 불운이 아닐 수 없다.

3년 동안 심리평가 열심히 하고 나오지만, 정작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어떻게 하는지 배운 바가 없고, 그래서 나처럼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상황이 반복될 여지가 많다.

기왕이면 트레이닝 때 심리치료의 초석을 다지고 나오면 좋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 한 경우가 많을 수 있다. 내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아동 치료 주로 하는 모 병원에 전문가 취득 직후 면접 갔다가 아동 평가 경험이 부족하니 수퍼비전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 라고 면접자가 시니컬한 어투로 나를 깠던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마음 상했지만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래도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참 싸가지 없는 양반이긴 하다. 뽑아주고 그런 얘기 하든가. ㅎ

전문가 타이틀 달았다 하더라도 3년 수련에서 배우는 것은 기본의 기본적인 것들일 뿐이다.(그런 점에서 산업인력공단에서 발행하는 임상심리사 2급 자격은 엉터리다. 취지는 좋았으나 자격 퀄의 관리가 제대로 안 되니 더이상 자격증 남발하지 않는 게 좋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진단을 감별하는 것 그리고 그 진단이 신경증, 경계선, 정신병적 성격 조직 중 어디쯤 위치해 있을지 가늠하는 것. 그렇게 배우고 나와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고, 그럴 때는 수퍼비전을 받아야 한다.

임상심리전문가가 가장 잘하는 분야라 할 수 있는 심리평가조차 이런데 상담이나 심리치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내담자나 환자의 마음에 공명하고 싶다면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직접 해보고 증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건 상담심리전문가들이 더 잘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범주화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상담심리전문가가 신경증 정신증 구분도 못 한다고 깔 처지가 아니다.

심리평가는 상담 초반에 들어가는 노력을 줄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지만(즉 빠른 가설 수립), 가설은 가설일뿐 내담자를 계속 보면서 그 가설을 재검토해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이는 1회성 심리평가가 지니는 최대 단점이다. 특히 초진 환자의 경우, 진단이 이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닌 걸로 엎어지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이건 내가 단순히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담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석사 졸업 후에도 1000만 원 이상의 돈과 최소 4~5년의 시간을 들여가며 수없이 수퍼비전 받는 경험은, 가설의 수정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내담자를 보는 시각을 예리하게 다듬는 과정이다. 증상을 보고 진단을 내리는 것은 기계도 할 수 있다. 증상 이면의 이야기를 캐치하는 데 있어서 임상심리전문가는 상담심리전문가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임상심리전문가 혹은 상담심리전문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배움의 과정에 자발적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뭐가 뭔지 몰라서 혼란스러울 때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고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말이다. 전문가로서의 윤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담자를 착취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런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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