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양육되길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투사를 되돌린 상태에서 보이는 상대와 의식된 나와의 관계. 그것이 어쩌면 진짜 관계가 아닐런지요.'

라고 썼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제껏 생각했던 관계들은 사실 나(우리가 나로 여기는, 에고 혹은 자아라고 하겠습니다)와의 아니 내(우리는 모르는 실제, 셀프 혹은 자기라고 하겠습니다) 안에서의 관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와 '자아' 사이에 투사된 '자기' 안의 관계들인 셈입니다. 맞습니다. 이미 '자기' 안에는 수 많은 내(나를 구성하는 수 많은 의식적인, 그리고 무의식적인 내적 인격)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아'가 모르는 '자기'의 구성 요소들입니다.

융이 이 구성 요소들을 자율성을 갖는 인격이라 칭한 것은 그래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내적 인격들은 한 가지의 감정 혹은 일련의 사슬처럼 연결되어 웬만한 노력으론 진행을 멈출 수 없는 감정의 사슬을 핵으로 하고 다른 것들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대개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어서 여간해선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경우, 나도 모를 어떤 자극은 어둠 속에 있던 그 내적 인격을 활성화시킵니다. 일단 활성화되면 순간적으로 그 감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해서 생각, 몸의 변화, 행동이 당연시되며, 아니 당연하단 판단도 없이 이어집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결론이 납니다. 똑 같은 후회, 혹은 그 결론에 대한 의심 없는 고집이 이어집니다. 후회를 하던 고집을 피우던 결말은 같습니다. 삶은 다시 한번 꼬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제 생각으론 일단 그것들이 내 안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내키진 않아도 한번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저도 그러려고 해보지만 쉽진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미 한 줄기 빛이 비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찰나지만 번개가 치듯 세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제대로 본 것은 아닐지라도, 그저 캄캄한 어둠 속이라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잠시나마 보였었습니다. 뭔가는 있었습니다.

그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은 암순응을 시키고 작고 희미하지만 심지어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고 꺼지기도 하지만 불빛을 들고 살펴보지요. 그곳에는 각양각색으로 무성하게 자라날 감정의 씨앗들이 무수히 있습니다. 무럭무럭 자라날 준비를 갖춘 씨앗들이 양분을 잔뜩 머금은 흙속에서 햇볕과 물을 기다리며 잔뜩 합니다.

이 감정의 씨앗들은 본능적으로 양육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정은 그렇게 양육되어야 합니다. 핵이 양육됨으로 인해 그 핵에 달라붙어 있던 생각도, 몸도, 행동도 분화되고 자라납니다. 새 순이 돋고 꽃이 피고 그늘을 만드는 큰 나무도 되고 곁에는 작은 것들이 어우러지며 숲을 이룹니다. 울창한 숲이 됩니다. 토양과 공기로 소통하는 그런 숲. 그래서 자연이 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관계는 그렇게 자연과 자연이 어우러진 것은 아닐까요.

@seoinseock님께서 식물 말씀들을 올려주신 것들을 보다 생각나서 적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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