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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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기상하는 나에게 꿈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매일 밤 너무 깊은 잠에 들어 꿈을 꾸지 않는 건지 아니면 꿈을 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면 아무런 기억을 못하는 건지 나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어찌됐든 나에게 꿈이란 닿을 수 없는, 실체 없는 환상에 가까울 뿐이다.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는 꿈을 꾸게 해 달라고 기도도 숱하게 했다. 그 바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음악을 만든다고 한동안 난리를 칠 때는 꿈에서 낯선 멜로디를 들어 부리나케 일어나 오선지에 적어 놓은 적도 있고, 또 언제는 글을 써 보겠다고 한바탕할 때는 꿈에서 신선한 문장을 보아 눈 뜨자마자 원고지에 적어 둔 적도 있다. 이렇듯 꿈을 꾸려고 애를 쓰기에 제대로 한 번 꿈을 꾸기라도 하면, 혹은 다시 말해, 꿈에 대한 잔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날이면, 그걸 기억하고자 무진장 노력한다. 침대에 누워 한참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고, 수첩에 적어 놓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런 ‘정리 된’ 꿈들이 내 머릿속에는 대략 대여섯가지 정도가 있다.

  2. 꿈에서 나는 분명 지하철 1호선 광명역의 몇 번 출구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운동화 차림에 배낭을 메고. 아마 경기도 광명에 한국의 첫 아이키아가 들어선다는 신문 기사를 그 날 오후에 읽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어째 꿈에서 광명역을 갔으려나? 나는 경기도 광명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그 어떤 추억도, 그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부끄럽지만 심지어 광명이 정확히 경기도 어디 즈음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니, 미안하지만 사실 관심도 없다. 아, 생각에 생각을 더해 보니 꿈에서 아이키아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파란 건물에 크게 박힌 노란 글씨의 IKEA. 그런데 나는 아이키아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아이키아 주변을 서성거린다. 나는 분명 다른 무엇을 애타게 찾고 있다. 목적지가 분명히 있는데 그곳을 찾을 수가 없다. 꿈에서 나는 그렇게 광명역의 몇 번 출구 주변을 돌고 돌아 헤매고만 있다. 꿈에서 누군가 묻는다. 왜 안 들어가세요? 아, 아뇨, 전 가야할 다른 곳이 있어요. 그런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3.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펼쳐 여행자도 읊고, 흔해빠진 독서도 읊고, 물 속의 사막도 읊고, 빈집도 읊고, 질투는 나의 힘도 읊고, 입 속의 검은 잎도 읊고,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도 읊고, 바람의 집도 읊고, 엄마 걱정도 읊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문득 기형도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구글 이미지에 기형도를 검색하여 사진을 훑어 보다가 실수로 구글 뉴스를 클릭했는데 기형도 문학관에 대한 뉴스 기사를 발견했다.

  4. 지하철 1호선 경기도 광명역 부근에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광명역의 아이키아 건물 옆에는 경기도 광명에서 나고 자란 기형도를 기리는 기형도 문학관이 있단다. 아아, 심지어 나는 그 꿈을 기형도 문학관이 설립되기 한참 전에 꾸었다. 아아… 심지어 나는 꿈의 누군가에게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아아, 아아…

  5. 날이 유난히 맑던 지난 토요일, 이른 오전부터 부지런히 집을 치우고 이불 빨래를 한 뒤 운동화를 신고 ‘입 속의 검은 잎’ 한 권을 배낭에 넣은 채 꿈에서 애타게 찾던 곳을 향해 떠났다. 윤동주에 대한 나의 태도가 끝없는 동경과 안타까움이라면 기형도에 대한 나의 마음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그저 끝없는 사랑스러움이다. 사랑스러운 기형도 시인.

  6. 나는 꿈에서 기형도를 보았다. 사랑스러운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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