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테리어용 나무와 범신론에 대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간략한 고찰

"모든 것은 99%의 진지함과 1%의 사기로 이루어진다."_호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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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무를 인테리어로 쓰면 안된다. 나무도 생명이고, 나무도 아픔을 느낀다. 내가 비밀 하나를 알려주겠다. 사실 나무는 인간을 뛰어넘는 종족이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앤트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모든 픽션들은 실제에 기반한다. 비범한 톨킨은 어린 시절 나무와 교감할 수 있었고, 그들의 위대함을 일찍이 간파하여 소설로서 세상에 알린 것이다. 나무의 본질은 한낱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아니다. 이렇게 간다면 인류의 마지막은 핵폭발이 아닌 나무들의 저항으로서 촉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의 첫 번째 타겟은 당연히 그들을 '인테리어'로 사용한 가게 주인들일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서구 근대 문명 뒤에 가려진 수많은 진실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는 인간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사실 신과 같은 종족이라는 것이다. 관련 자료를 51구역에 숨겨온 덕분에 산업화와 숲 개발은 차질 없이 기득권들의 이익에 부합하며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지금이라도 다 죽기 싫으면 나무를 관음적인 인테리어용으로 쓰는 것을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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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은 당연히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신은 세상을 설명하기에 참 쉽고 믿음직한 방법이다. 10만년 전쯤 가상의 관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뇌를 갖게 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위험천만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수들이 우리를 잡아먹는다. 번개에 집이 불타고 마을이 홍수로 잠긴다. 그러나 세상은 아름답기도 했다. 세상을 밝혀주고 따뜻하게 해 주는 위대한 태양을 찬미하라. 마치 우리를 위한 것인 양 잘 익어 있는 과일들은 또 어떤가. 인류는 이 현상들을 이 세상에 나름대로 질서를 부여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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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에 나가기 이전 동굴에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하는 의식 행위는 실제로 사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글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 특정한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방법은 춤과 같은 행동으로 몸에 체화되는 일련의 의식과정 뿐이였기 때문이다. 사냥 전 동굴에서의 의식은 감정을 고양시키고 공동체를 단합시킨다는 원초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사냥 노하우를 아랫세대들에게 전수시키고 몸에 배이도록 연습시킨다는 실용적인 의도 역시 있었던 것이다. 청동이나 철을 제련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의식으로써 전수되었다. (그렇기에 엄밀하지 않고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전은 실험과 관찰이 아닌 우연한 '사고'로 이루어졌다) 글이 없었던 시절 석가모니의 말씀을 그의 1세대 제자들이 노랫말과 같이 외웠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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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렇게 초기 인류에게 나타나게 된 '의식 행위'은 인류에게 개체성을 뛰어넘는 집단과 융화되는 느낌, 더 나아가 거대한 무언가와 합일되는 감정을 전달하게 되었다. 가상의 관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집단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사회적으로 진화했기에 개인을 뛰어넘은 무언가와의 연결을 갈구하며,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해하고자 싶어하는 본성을 가진 인류는 '신'을 만들어낸다. 신은 놀랍게도 사과가 왜 여기 있는지, 태양은 왜 따뜻한지, 비는 왜 내리는지, 인간은 왜 죽는지,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등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신은 현대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신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과학은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과학의 영역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 역시 우주의 시작이 무엇이며, 그것의 목적은 무엇인지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이 우주의 부분집합인 이상, 우주 전체의 미스터리가 완전히 풀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신'이라는 관념을 상상하고 모두와 공유할 수 있는 뇌를 가진 존재가 이 우주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인류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마음', '의식', '지능', '내적 세계' 등 뭐라고 부르든, 이것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니다. 어떤 생명체가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쩌면 '의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 형태들에는 본질적인 목적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생존이다. 자연이 생명을 부여한 이상, 모든 생명체들은 스스로의 목숨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를 갖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계속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충전을 위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로봇 청소기의 앞을 가로막아보면, 우리는 분명 그 고철덩어리에게서 일종의 ‘욕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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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리고 놀랍게도 많은 철학자들까지도) 여전히 영혼이든 슈퍼에고든 간에 부가적인 무언가를 전혀 가정하지 않은 채 의식이 설명될 수 있다는 희망을 고수한다. 사실 물리학의 역사를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화학, 생명, 빛 등은 각각 물리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선언되었지만, 다음 세대들에 의해 이들은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의식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 하나인 '범신론'은 인테리어용 나무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해낸다. 범신론은 실재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이 그 자체로 '심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한 유기체들이나 의식 있는 생명들이 구성되는 것은 이 특성 때문이라는 견해다. 이와 반대되는 유물론은 물질이 어느 정도 복잡해졌을 때 자체의 생물학적 체계로부터 의식이 '창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 과학계의 주류 견해이자 hoteve가 믿는 바이다) 하지만 이 견해가 참이라면 대체 어떤 층위에서 의식이 발현되는가? 의식에 대해 필요한 특성과 성분들은 무엇인가? 그 어떤 결정적 대답도 아직까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식은 유기적 체계 내에서 '발생'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실재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들에서 비롯된다는 관념, 우주의 기본적인 물리적 구성 요소들이 심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는 관념인 '범심론'이 나타난 것이다. 이 관점은 결국 모든 마음을 지닌 존재들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다시 말해 인테리어용 나무와 신은 같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범심론이 곧 범신론인 셈이다.
범심론이 우리 인간의 의식뿐 아니라 더 넓혀서 물리적 실재의 근본적인 구성적 특징으로 상정하는 것은 ‘경험 자체’다. 이것은 의자나 책상이 의식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범심론은 유기적 생명 형태들, 즉 살아 있는 것들에게만 의식을 귀속시킨다. 다시 말해 단세포 유기체에서 벌레,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는 모든 것은 다양한 정도의 ‘의식’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물론 의식이라는 단어 자체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지능’, ‘의식’, ‘마음’ 모두 제대로 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동안 이러한 것들은 오직 ‘당연하게도’ 인간에게만 국한된 특성이였고 인간을 중심으로 정의내려진 단어였다.하지만 인공지능의 등장과 외계 유기체의 발견 가능성, 뇌 과학의 발달 등으로 이 패러다임은 무너지고 있다. 예를 들어 벌레는 파충류 뇌는 없지만 신경절이라는 신경 중심들이 있으며, 눈은 없더라도 광수용체들을 통해서 빛을 감지한다. 그러므로 범심론은 그런 신경 중심과 광수용체들이 벌레의 삶에 필수적인 어떤 원시적 형태의 의식적 경험을 수반하거나 생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벌레의 의식은 인간의 의식과 관련하여 대단히 동떨어져 있지만(그리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벌레는 어느 정도 의식적이며 나름의 내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무 뿌리가 물이 있는 곳으로 뻗어나가는 것도, 해바라기가 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미약한 수준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게임 프로그램의 몬스터나 로봇 청소기의 의식 수준과 식물의 의식수준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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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의식 형태는 무엇일까? 의식의 본질이란 대체 무엇인가? 범경험주의라고 불리는 범심론의 한 유형을 제안하는 갈렌 스트로슨(Galen Strawson)은 의식이란 '경험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경험은 의식의 필수적인 구성 성분이다. 전신 마취를 했다고 생각하자. 전신 마취처럼 의식이 없는 상태에는 개체가 겪고 있는 ‘경험’이 없다. 마취에서 깨어나 수술 부위의 통증 같은 내부 세계와 동시에 주변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할 때에만 우리는 의식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의식은 어떤 경험 사례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물리적 실재가 매트릭스와 같은 환영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감지하는 방식으로 어쨌거나 실재를 경험한다. 즉 현상적 경험은 자체적으로 물리적 실재의 선험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범신론자 리카도 만조티(Riccardo Manzotti)는 이에 따라 자아는 세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자아는 세계 경험을 확장하는 지레, 몸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렛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굶주린 모기, 너네 집에 말라 죽어가는 화분 모두 세상을 나름대로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로봇 청소기조차도 그럴지 모른다. 우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현상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우주를 경험하는 우리, 인테리어용 나무는 사실상 신과도 같다.
주요한 의문은 어디서 또는 언제 의식 있는 마음이 생성되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경험의 주체' 또는 나는 존재한다의 '나'인 의식 있는 마음의 기원은 칸트도 데카르트도 제대로 서술할 수 없었던 가장 엄청난 철학적 불가사의다. 데카르트는 의식 있는 존재자로서 인간들은 사유하는 실체(res cognitans)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것은 여타의 의식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들의 의식적 생활만을 서술할 뿐이다. 더 심층적인 의문은 이럴 것이다. 의식 있는 존재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에 국한되지 않은 의식이란 무엇인가? 어쨌거나 범심론처럼 의식이 모든 유기적 생명 형태들에 존재할 뿐 아니라 물리적 실재의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관념은 현대 과학에 대한 저주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양자적 층위에서 의식이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은 비로소 의식이라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몇십년만 두고 보면 증명될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나무가 지배할 것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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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님, 이 글은 인테리어용 나무가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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