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만이 살길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 크리스천들에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선거를 할 때, 후보자들이 국민을 지칭하는 말 앞에 수식어로 붙이는 말이 바로 ‘사랑하는’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나 ‘사랑하는 시민여러분’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말처럼 식상한 말이 따로 없다. 그들이 정말 국민을 사랑해서 공복(公僕: 공적인 종)이 되겠다고 출마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다. 권력을 움켜쥐고 싶은 욕망이 그들의 삶의 목표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이 교회에도 있다. 바로 ‘기도만이 살길’이라는 구절이다. 우리네 교회에서 기도라는 단어가, 얼마나 왜곡되어 버렸는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그래서 기도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성경적인 기도도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고 응답이 내려오지도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수도 없지 강조하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도행위는 주일성수로 대표되는 예배행위와 더불어 종교행위의 일부로 시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신이 기도만이 살길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도란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필수적인 통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과 내 영혼이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수단이 바로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고 시행하는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종교행위로 알고 있다.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린 선물보따리를 얻고 싶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회에서 시행했던 기도가 아무런 응답이나 능력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 않으며 무능하고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59: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화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1~16)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15:29)

우리네 교회에서 가르치고 시행하는 기도에 응답이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즉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고 깊고 친밀하게 사귀는 통로인데, 사람들은 그런 목적이나 동기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거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자리에 앉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이다. 설령 어쩌다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였다고 할지라도, 다시 삶의 문제가 생기거나 기도제목이 생길 때까지 기도를 쉰다. 그러나 개중에는 규칙적으로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벽기도회에 성실하게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평생 동안 성실하게 새벽기도회에 나왔을지라도, 그들이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도 않으며 성령의 내주를 간구하지도 않는다. 목회자이거나 교회 중직자, 혹은 아침잠이 없는 노년의 권사님들이, 자신의 희생적인 종교행위를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자기만족으로 삼아서 교회마당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새벽기도회에 나오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라고 하였고, 사도바울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다. 즉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것을 가슴에 번쩍이는 훈장으로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새벽기도회를 평생 동안 다녔어도 무능하고 무기력한 신앙으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다.

‘저는 아침저녁 기도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목사님께서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기도하고 있다고 설교 중에 예화를 들며 말씀하십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허비하는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위의 구절은 필자의 칼럼에 댓글을 올린 어느 회원의 글이다. 그분이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기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가보다. 물론 교회가 가까워서 기도하기 좋다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된다. 그러나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힐난하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라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교회 중심적이고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려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형식적이고 탐욕을 채우는 기도를, 겨우 1,20분간 한 것을 대단한 기도행위로 손뼉을 쳐주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설령 교회에서 시행하는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만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와 능력 그리고 열매가 있다면 당연히 그런 기도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조차도 성령의 능력이나 증거가 없는 종교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고 있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능력 있는 기도의 습관을 들일 것인가?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농경사회에나 가능한 일이다. 목회자조차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모자란 잠을 청하면서, 기도회를 마치고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해야 하는 교인들에게 새벽기도회를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네 교인들은 기도만이 살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감나지 않은 이유이다. 지금까지 기도한 결과가 빈 쭉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습관을 들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힘을 믿고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가시길 바란다. 어차피 교회에서 가르치는 기도로는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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