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의 침략을 물리친 남원 교룡산성 선국사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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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교룡산성은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으로 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 지리지 같은 고서에 교룡산성은 백제시대 처음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모습은 조선시대의 축조방식으로 길이는 약3.2km에 달하고 성안에는 선국사가 지금까지 남아있고 은적암, 덕밀암같은 절터가 남아있습니다. 현재 성의 모습은 조선시대 축조방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원은 예로부터 섬진강을 따라 올라오는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한 곳이었습니다. 고려말에는 이성계장군이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고 임진왜란때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교룡산은 높이가 518m 정도의 산이지만 산세가 가파르기 때문에 유사시 주민들이 이곳에 대피해 왜구들과 싸울 수 있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곳입니다. 성안에는 99개의 우물이 있었고 산 정상에서는 사방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난 곳입니다.

임진왜란당시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임진란 3대 승병장이라 할 수 있는 금산사 처영대사가 승병들과 함께 교룡산성을 축조하고 왜군들과 싸운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극렬하게 저항한 승병들의 위세에 질린 왜군들은 정유년에 재 침략해 승병들의 근거지인 사찰들을 불태우게 됩니다. 지난번 포스팅한 만복사지도 이때 불타게 됩니다. 은적암은 3.1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명인 백용성 조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합니다.

교룡산성 안에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이 있었고 된장과 같은 장류 장아찌를 보관하는 장고도 있었다고 합니다.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동학군이 주둔해 있었고 동학교주 수운 최제우는 이곳 은적암에 머물며 동학의 뿌리가 되는 <논학문>을 지어 동학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농민혁명당시 접주 김개남이 이곳에 머물며 관군과치열한 전투를 벌인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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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입구는 반월형으로 홍예문을 만들고 S자 형태로 만들어 적군이 쉽게 성안으로 진입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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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을 들어서면 불망비들이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성을 축조한 사람들의 공덕이나 선정을 베푼 인물들의 공덕을 잊지 않는 다는 의미로 세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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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 안으로 들어서면 토종닭 백숙같은 것을 파는 식당도 있고 산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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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과 비탈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저는 산성 답사보다는 선국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선국사 방향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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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보제루 모습입니다. 이곳에는 나라에서 처영대사에게 주었다는 구리로 만든 도장이 있습니다. 절 이름에 나라 국(國)자가 들어가는 것은 나라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도장은 김개남이 선국사에 있을 당시 분실했다가 훗날 보제루 마루밑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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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대웅전 모습입니다. 낡고 작은 법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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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안에는 특이하게 큰 북이 있습니다. 아마 유사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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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보제루에서 바라본 남원시내 모습입니다. 멀리 지리산 줄기도 보입니다.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은 3년전 부처님 오신날 무렵에 촬영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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