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이야기 -정보, 저장, 생산으로서의 인쇄, 언어와 문자, 문자성, 글쓰기와 글읽기 : 아홉번째 글

먼저 맛보기 글은 다음과 같이...
①<알파벳문자만이 문명문자라고 한 자 둘. 루소와 맥루한. 이런..>
②<한글은 문자. 찌아찌아어는 언어. 같이 가보려 했는데>
③<글로는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말로는 뜻을 다 전하지 못한다>
④<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왜? 면죄부 대량 판매로 돈벌려고>
⑤<중국에서 유럽 전래. 종이, 화약, 나침반. 금속활자는 빼야>
⑥<한자, 표의문자는 옛 인쇄술 발전에는 불리. 독특한 에크리튀르>
⑦<먹, 벼루, 붓과는 달리 종이는 기원 후에 발명되었다. 음...>
⑧<양피지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 금지땜에 탄생했다>
⑨<진시황은 분서갱유 당시 종이책을 불태우지 않았다>

1.~7.

  1. 문자성과 문자의 우월성이란 실체인가 허상인가?

책을 주제로 글을 시작하였는데 벌써 목차 포함 아홉 번째 글이다.
먼 길을 왔다.

앞의 7.에서도 얘기했지만 언어(言語)에 관한 이야기는 멈추고
문자(文字)에 관한 애기로 간다고 말씀드렸다.

(가) 들어가기 - 두 가지 주제를 찾아내기

언어에 대응하여 문자를 살피면 크게 두 가지를 주제로 삼는다.

⒜쓰기와 ⒝읽기

이를 살피려면 글(문자)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이 재미나는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다뤄야 할 두 가지 주제가 또 있다.
지금까지의 서구중심의 학계는 아래 두 가지의 오해 또는 오류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식민제국주의적(植民帝國主義的) 관점과 여전히 맞닿아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년)가 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젖은 생각이다.
어디 말도 되지도 않을 소리를...그러나 엄연하다.
나는 종종 유럽을 얘기하거나 근대 유럽 지식인을 언급하면 반대로 떼놈들이라고 한다.
이는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발로이다.

자주 봤고, 보게 될 것이다.

①하나는 문자가 있느냐 없느냐는 야만인과 문명인의 잣대로 삼는 것이다.
②다른 하나는 문자가 알파벳이냐 아니냐에 따라 후진성과 선진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나) 그럼 순서대로 살펴보자.

① 문자가 있느냐 없느냐? 그게 뭣이 중한디?

아마 직전 글 <인문 카페(59)>에서 찌아찌아족이 ‘찌아찌아어’ 표기법으로 한글을 채택하려 했다는 얘기에 아마 ‘틀림없이’ 우리 민족과 한글의 우월성(우수성이 아니다)을 마음에 가졌을 거다. 거의 대부분이.
물론 찌아찌아족에는 세종대왕 같은 분은 안계셨다.
그래도 자기 언어의 표기를 위해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의 문자를 받아들여 사용중에 있다.
소통과 기록에 문제가 없다면 우리가 우월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나라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에 어떤 문자를 사용하여 한국어(우리말)을 표기하였던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누군가가 중국의 한자(漢字)가 동이족(東夷族)이 고대 중국의 지배계층이었던 시절에 만든 문자라고 하는데 이를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는 한글(즉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찌아찌아족과 같이 문자가 없었다.
문자’없는’ 한국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럼 우리는 야만인이었던가?
그러면 뭘로 기록하였고, 그 기록을 통해 소통하였는가?
지금의 학자들은 이를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기록은 그냥 중국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공부하기가 어려웠겠지.
그러니 최치원이나 의상대사는 중국으로 유학을 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동아시아를 한자(漢字)문화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두와 구결은 문자(文字)가 아니라 당시 한국어 표기방법을 말한다.
따라서 굳이 말하자면 이두법과 구결법이라고 하는게 맞겠지.
이두문자, 구결문자가 아닌 것이다.
암튼 그러면 이두와 구결은 무엇인가?
한국어(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와 구결의 문자 또한 한자어라는 것.
우리말을 발음하는 것 하나하나를 어떻게 한자어를 대입하는가에 따라 이두법을 따를 수도 있고, 구결법에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를 상론하면 너무 글이 길어진다. 나도 좀 쉬어야 한다.
나중에 다뤄도 늦지 않다.
다사 한번 묻는다.
문자가 있고 없고를 원시적, 야만적이거나 문명적이거나를 가르는 우월성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가?
있다면 다행히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어휴 다행이다)은 문명국가(文明國家)이다.
문명화된 나라라는 말이다.
답을 하기 전에 하나만 더 첨언한다.
문자의 유무를 야만과 선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흔히 문자(文字)로 인하여 인간사회에서 ‘본질적(本質的)인 의사소통(意思疏通)’이 가능한 만큼, ‘문자’를 ‘말’ 다음으로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적 궁극의 요소가 ‘언어’ 곧 정보라면(직전 게시글<황야설수야설(黃也說竪也說)의 작은 인문(人文) 카페(57)>에 있다) ‘말’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질적인 의사소통은 나라에 따라서는 수세기에서 수십세기동안 소수의 엘리트가 독점랬던 것이다.
이 점이 정말 중요하다.
세종대왕이 ‘한자’를 개량한 문자가 아니라, 전혀 다른,
정말 우리말 발음 그대로를 담으려고 한,
중국식의 발음과는 독립된[동국정운(東國正韻)은 독립하여 만들지 못하였지만] 문자[훈민정음(訓民正音)]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러기에 정말 다행스럽고 행복하고 위대한 것이렷다. 우와...짝짝짝.
그러니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되지 못한 문자(文字)는
오랫동안 인간사회의 소통에 (문자를 통한)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말로 통합(統合)되어 있던 나라(사회, 부족 등)를 문자로 분리(分離)시켰다.
권력과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문자에 의한 소통은 본질적(本質的)인 것이었다.
어떤가. 여기까지의 글에서 느낌이 오는가?
과거 고대와 중세의 역사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졌을 삶의 느낌의 일부를...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그들은?
② 문자가 ‘알파벳’이냐 아니냐가 후진성과 선진성의 기준일까?
<한자, 표의문자는 옛 인쇄술 발전에는 불리. 독특한 에크리튀르>
이 글은 9.21에 올린 것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인쇄시대 이전의 아날로그 인쇄시절에는 표어(그리고 표의)문자인 한자어의 활판인쇄술(금속활자인쇄술)의 발전은 초기 활판인쇄시절에는 매우 더뎠다.

그 이유는 페이스북의
-<황야설수야설(黃也說竪也說)의 작은 인문(人文) 카페(55)😠9.21)
-<황야설수야설(黃也說竪也說)의 작은 인문(人文) 카페(57)😠9.23)
에 정리하였다.

이것이 한자어에 대한 알파벳의 우월성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왜 특정의 문자 형태가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척도가 되는가?
이것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사고습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반증.
질문이 ‘중국인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지 않군요’라고 한다면 좀 나을까?
아니면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라고 한다면 더 나을까?
알파벳이 다른 문자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장한 유명한 자 ‘둘’을 들겠다.

⒜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년)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게 그가 남긴 여러 권의 저술(영어 이름으로)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 1754)
-에밀(Émile: or, on Education, 1762)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 or Principles of Political Right, 1762)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y on the Origin of Languages, 1781)
마지막 글(책이라고 안한다. 뭐 잡문이니 그럴 수 밖에)의 제목을 보자.
그는 이 글에서 ‘알파벳을 모르는=글을 모르는’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의 한자어는 알파벳 자모문자가 아니기에 야만적인 문자로 여겼다.
사실이냐고? 사실이다.
논증은 없다.
루소의 대부분의 책은 논증이 없다.
나처럼(그래도 나는 머리 좀 굴리는데) 머리에서 나오는대로 썼다.
그런데 유럽 지성사에 이름을 올린 루소는 수준 낮은 매설가로 ‘빌어’먹고 살던 자로서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다.
그래서 그의 모든 저작은 치밀한 연구 서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냥 글.
쉽게 말하면 잡글이다.
그런데 이런 잡글로만 벌어먹고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돈 많은 유부녀인지 미망인인지 그녀에게 빌붙어 살았다.
나는 사랑이라고 안본다.
<에밀>도 별 책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르치지 말고 그냥 자연에 냅둬라라고 하는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틀린 말이 아니라 흔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참 교육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 <에밀>에 빠진 분이 아직도 계신가?
이게 나의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예이다.

⒝ 맥루한(Marshall McLuhan)(1911∼1980년)

미디어학계에서 신으로 모시는 분 아닌가?
‘중국인은 부족단계에 있는 민족이며. 청각이 발달한 민족이다.’
‘한자는 알파벳문자가 아니며, 오직 알파벳문자만이 인간을 부족민의 영역에서 문명인의 영역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건 <구텐베르크 은하계😠1962)
그는 인쇄미디어인 책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다.
시각 중심으로 집중시키면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제한 시켰다는 평가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전자기술미디어를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책(서적)은 열등재인 핫(Hot) 미디어이다.
그에게는 바보상자 TV가 우등재인 쿨(Cool) 미디어이다.
-이건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1964)
에잇...제길...
도대체 맥루한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내가 올린 글 중에는 맥루한을 다룬 글들이 많다.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자주 벽을 만난다.
도저히 맞지도 않는 말을 뱉고 있다.
루소만큼은 아닌데...
이런 맥루한이 오리엔탈리즘의 구습에 여전히 빠져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나는 계속 그를 추적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석학(碩學)(?) 두 분이 한국어를 알며 한글을 알까?
그들이 말하는 알파벳에 한글이 포함될까?
아니다. 그들은 한글을 모르는게 아니라 동양을 미개하다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역시 오리엔탈리즘.
이들이 바로 서구 철학이 늘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진 자들이다.
선험적 오류.
글의 말미에 다시 적는다.
아..그런데 ‘알파벳(Alphabet)’ 이름은 뭔가?
페니키아에서 넘어와 그리스에 안착한 글자(문자)의 순서가 알파, 베타이니 이를 그대로 ‘알파벳’이라고 한게 아닌가.
무슨 고상한 자모문자 이름이라고..
부르는 이름으로야 한글이 더 멋있지!
이거야 부족간 경계석을 서있는 돌이라고 ‘선돌’
부족장의 묘를 만들 때 밑에 괸 돌을 보고 ‘고인돌’이라고 한 것과 다른게 뭐냐?
단순하기는... 페이스북의
-<황야설수야설(黃也說竪也說)의 요리 '이름' 야그②😠2016.8.2) 참조.
다행히(?) 우리나라 한글은 알파벳 문자이다.
세종대왕님이 18세기에 유럽 떼놈들이 이럴줄 미리 아셨나?
그래서 외국인들은 한글을 Korean alphabet이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파벳 자모문자이다.
통칭하여 음소문자. 상위분류로는 표음문자이다.
인류의 문자는 기호문자에서 음절문자(syllabary)로 그리고 알파벳(alphabet)으로 발전했다는 귀납적 발전론 때문에 그들은 알파벳을 최고로 보고, 기호와 유사한 한자어를 후진적인 글자로 본 차별적 의식은 루소의 18세기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근대에도 중세 기독교적 사고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들은 알파벳을 하느님이 만든 것으로서 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다.
근대와 함께 이성(異姓)을 발견하였더라도 유럽 지성인들은 쉽게 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궁여지책으로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이신론(理神論, deism)까지도 나오지 않았던가?
아인슈타인도 이신론자(理神論者)였던가?
바벨탑이야기로는 번지지 말자.
우월성의 근저에는 종교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환기 시킨다.
우리도 우리 한글의 우수성(優秀性)을 언제나 주장하고 강조한다.
가끔 우월성(優越性)을 주장하기도 한다.
거의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자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알파벳이나 한글이 한자어보다도 우월(優越)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한자우월론(漢字優越論)을 주장하는 사람 또한 매우 많다.
숫자로 따지면 중국 사람들 거의 전부를 더해야 할 것.
논증으로 들어가면
각자의 우월성 주장 근거가 오히려 열등성 근거로 사용될 수도 있고,
디지털화가 기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상론하지는 않는다.
앞의 두 가지 주제는 인류학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문화의 상대주의(相對主義)와 절대주의(絶對主義) 논쟁을 유발하는 주제이다.
모더니즘(modernism)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가르는 큰 주제이기도.
문자(文字)는 문명(文明)안에서 존재하고 문명(文明)은 문자(文字)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문자를 모르는, 읽고 쓰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사회, 민족 등)은 인류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순환논증의 오류’[선결문제 요구의 오류(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 또는 ‘부당 가정의 오류(fallacy of undue assumption)’라고도 한다]에 빠져들기 쉬운데, 바로 여기에서 빠질 것이다.
오늘 글은 여기에서 멈춘다.
답은 여러분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대한 사유와 논증의 몫은...

...to be continued

목차

  1. 정보의 저장고
    가) DNA
    나) 대뇌피질
    다) 문자, 책, 도서관
  2. 뭘 더 알아볼 것인가? (이번 글)
  3. 정보의 저장 방법 - 소리 전달 이후의 글쓰기
    가) 어디에다 글을 썼을까?
    나) 책(冊, book)이란 낱말은 어디서?
    다) 책의 형태는?
  4. 정보의 대량 생산
    가) 인쇄 기술의 발전과 배경
    나) 종이와 인쇄술
  5. 인쇄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 대량생산과 보급
  6. 무엇을 쓰고, 인쇄하나 - 언어와 문자의 구분
  7. 정리된 ‘언어’와 ‘문자’의 구분 기준과 ‘언어’의 외연
  8. 문자성과 문자의 우월성이란 실체인가 허상인가? (이번글)
  9. 글쓰기와 글읽기가) 흥미있는 서두 열기
    나) 먼저 글쓰기
    a) 서론
    b) 고대 그리스 글쓰기 시작 - 문자의 도입
    c)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글쓰기 - ‘물구나무 쓰기’부터
    d) 고대 그리스 알파벳의 글쓰기 - 소몰이 쓰기법
    e) 로마자(라틴 문자)의 시작
    f) 로마자(라틴 문자)의 변화 - 소문자 등의 등장
    g) 로마자(라틴 문자)의 변화 - 오늘날의 글쓰기 시작
    h) 한자문화권의 우종서와 좌횡서
    다) 이어서 글읽기
    a) 글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개념
    b) 글읽기와 관련된 몇 가지 관점
    c) 성독과 묵독에 관한 맛보기 글
    d) 글읽기의 대상 – 문자의 종류
    e) 글읽기 – 성독
    f) 한자문화권의 글읽기
    g) 여담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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