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프로토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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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가 무너졌다. 수많은 이들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집 또는 직장을 잃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월가 임원들은 벌금이 아닌 거액 보너스를 챙겨 갔고 연방정부는 사망 직전의 금융기관들에게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제도권의 도덕적 해이를 목격한 시민들은 분노했고 은행과 정부를 불신했다. 이런 절망 속에서 비트코인이라는 암호화폐가 탄생했다. 암호화폐를 받쳐주는 블록체인 기술은 그렇게 서서히 세상에 알려졌다. 벌써 10년전 일이다.

블록체인은 분산장부 기술이다. 스마트컨트랙(smart contract: 입력된 계약 조건을 실행하는 거래 프로토콜)이 가능한 합의 알고리즘이자 데이터베이스이다. 블록체인이 일상화된 세상에서는 정보권력이 분산되며 오류와 조작이 크게 줄고 많은 거래들이 탈중개화(disintermediation)된다. 돈과 정보를 독점하며 횡포를 부려온 기관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다양한 분야의 불필한 중개인들이 제거돼 지금 보다 훨씬 효율적인 경제체제로 진화하게 된다.

물론 불록체인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제 막 유아기를 벗어난 블록체인 산업은 야심찬 비전에 비해 실현할 실력과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 기술 확장성과 상호운용성 같은 난해한 과제들이 쌓여 있어 다수의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현시점에서 투자대상으로 불안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블록체인은 인간사회가 풀기 어려운 ‘신뢰(또는 불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뢰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금융권에 쓰는 수수료와 이자, 계약에 드는 인건비는 모두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에서 발생하는 비용들이다. 혁신적인 기술 발전으로 삶의 질이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신뢰를 위해 수 많은 중개자들을 활용한다. 블록체인의 스마트컨트랙 기능은 이런 ‘신뢰 비용’을 극적으로 낮춰 준다. 스마트컨트랙을 단순히 설명하면 제3자 공증이 불필한 무인자동판매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블록체인의 본질은 고유 알고리즘으로 공정한 자동합의를 만들어내 이질적인 개인들간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있다.

지구상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민주국가 중 ICO(Initial Coin Offering: 코인 공개)가 불법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정부는 암호화폐 투기열풍을 이유로 ICO 합법화를 등한시 한다. 자본 조달 수단을 차단하고 혁신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세금으로 블록체인 인력을 육성하겠다는 정책은 냇물 상류를 막고 저수지 물을 퍼 와 수위를 높이겠다는 미련한 발상으로 들린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분리해 보는 시각 또한 인터넷과 이메일을 나눠 생각하는 아둔함과 유사하다. 인터넷이 정보를 교환하듯 블록체인은 가치를 거래한다. 산업 진화 과정에서 기술과 자본 축적은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토종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이 싹을 피우기도 전에 해외로 쫓아내 글로벌 업체들로 키우려는 정부의 심오한 철학인가? 처음에는 나도 그저 미지의 신산업을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공무원 특유의 기질이 발동한 줄 았았다. 현정부가 개방된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블록체인을 대하는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역시 ‘신뢰 비용’이라는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정부는 ‘어리석은’ 개인 투자자들의 판단력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국내 기반 블록체인 산업으로 유입되는 민간 자본을 제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진실이다.

신뢰는 상호적이다. 국민을 신뢰하지 않는 정부를 어떻게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가? 정부,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 합의는 신뢰에 기반한다. 합의보다는 대립이 유리한 사회정치적 구조에서 갈등을 조장해 먹고 사는 정치인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자아실현 내지 완력다툼을 위해 미래 산업을 짓밟는 것이 합당한지는 의문이 든다.

어떤이들은 사회가 당면한 모든 경제 문제들을 정부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정부는 해결책의 주체가 아니라 문제의 근원에 가깝다. 그래도 극단적으로 비관할 필요는 없다. 민심을 무시하는 정치나 시장을 거스르는 정책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진실이니까.

아직은 블록체인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멀지 않은 미래에는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하듯 블록체인을 일상에서 활용하며 블록체인이 없던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워 할 것이다. 인터넷이 ‘연결’의 개념을 바꿔 놓았듯이, 블록체인은 ‘신뢰’라는 관념을 새롭게 정립할 것이다.

기술은 중립적이다. 인간을 종속시킬 수도 있지만 해방시킬 수도 있다. 미래는 예측이 아닌 선택과 믿음으로 구현된다. 답이 뻔할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블록체인과 정부 중 과연 무엇을 더 신뢰하는가?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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