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시작과 끝'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었던 어느날 밤, 그렇게 커질대로 커져버린 마음을 참았던 기침처럼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 채 고백해 버렸다. 사랑한다는 말의 용도를 난생 처음 알아버린 것이다. 이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있었지만 사랑을 알게 되자 동시에 사랑이 아닌 것이 가려졌다. 세상에는 많은 기적이 존재하지만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이 아니라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기적같은 일도 없다고 믿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면 사랑이 끝났을 때 반드시 온 마음을 잃는다. 평생 한번도 만나기 힘든 기적을 마주했으니 온 마음을 다할 수 밖에... 하지만 간혹 마주칠 수 있는 기적을 일상사로 만들어 버린 다른 기적이 존재했으니 처음 만난 기적같은 서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기적.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일만큼이나 보기 어려운 기적이 존재함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 끝을 견뎌하기가 조금은 수월했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랑의 순간은 찰나처럼 짧고 나날이 지속되는 관계의 변화는 영원하다. 어제까지 사랑을 말했던 그 사람이 오늘은 이별을 말하는 상황. 길고 긴 시간의 힘 앞에서 우리의 사랑이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
고통스러웠다. 내 계획을 들은 주변의 만류와 안스러워 건네는 위로가 정말이지 0.00000001 사토시만큼도 와닿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거세된 것처럼 눈을 떠있다는 사실 외에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다른 방법이 없을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글와 음악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모든 언어와 소리가 비수가 되어 마음을 난도질 해댔다. 안 그래도 키만 멀대같이 크고 마른 몸이 10kg나 빠졌으니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을뿐 산적처럼 자란 수염과 함께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을 것이 뻔했다. 주변 지인들은 전문의와 처방약을 권했지만 미련스럽게도 오롯이 그 고통을 삼켜냈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사그라들 때까지 그저 숨죽여 누워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떤 말도 어떤 음악도 나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요즘은 차사고도 일방적인 과실이 잘 발생하지 않는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있다 누군가 뒷꽁무니를 들이받았다 해도 가만히 있었던 것조차 과실로 인정되어 쌍방과실이 된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따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실비율에 따라 보험처리를 받으면 되는 차사고와 달리 사고로 인해 깨어진 관계는 과실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누가 어떤 잘못을 어느만큼 했느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나눈다고 할지라도 깨어져버린 관계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상대방 보험사에 의해 차정비를 받을수도 없고 병원치료를 받을 수도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사고로 인해 발생한 출혈은 순전히 홀로 남겨진 각자의 몫이 된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약효를 볼 수 없을만큼 망가져버린 몸 안에 들어온 약은 독이 될 뿐이다. 예방 접종 전에 몸상태를 체크하고 종종 접종 후 이상증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아주 조금씩 회복된 몸과 마음을 부여잡고 외출을 실시했다. 사람이 있는 공간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집으로 되돌아오기를 몇번, 진단을 받아보지 못했을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날들의 나는 분명 정신병적 징후를 여럿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겁에 잔뜩 질려버린 생쥐처럼 외출을 시도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집으로 도망가는 일을 반복하는 중에 조금씩 외출해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드디어 약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 감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뒤틀리는 동안 글보다는 편했던 음악을 듣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당시 만난 유능한 명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조규찬'이었다.
"사랑이 끝나는 시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것이 그들이 언제 헤어졌느냐와 상관없이 다른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진정 슬픈 이별은 이별로 절규하거나 흐느끼는 순간이 아니라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 비로소 이별은 성립되며, 그 '망각'이 진정한 슬픔이 됩니다."
이별을 노래한 수많은 음악들이 있었지만 그의 얘기처럼 헤어진 시점 이후 그토록 사랑했던 누군가로 인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된 그 망각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사랑으로 인해 다시금 다른 종류의 슬픔을 노래한 음악은 없었다. 그 즈음 나는 정말 거짓말처럼 밥을 챙겨먹고 거울 속 나를 피하지 않게 됐고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친구가 보고 싶어졌고 이쁜 여자에게 눈이 갔고 웃음이 늘어갔고 무엇보다 잠이 늘었다. 예전처럼 마음속으로 절규하거나 흐느끼진 않았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은 내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슬펐다. 그제야 비로소 함께했던 짧은 날보다 혼자였던 날이 훨씬 더 길고 길었던 첫사랑이 끝을 맺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