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립대학ㅡ서원
한석봉 글
조선에는 향교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성균관의 하급 관학으로 유생들이 이곳에 모여서 유교성현들에게 제사도 지내고 성리학 공부도 했지요. 지금으로 치면 대략 지방국립대학 정도 됩니다. 고려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지요.
그러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원이란 것이 나타납니다. 서원은 현대의 사립대학 정도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는 일도 향교와 비슷하지요. 제사지내고 공부하고. 최초의 서원은 중종 대에 만들어진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으로 ‘안향’이란 인물을 배향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원입니다. 안향은 한반도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이지요.
그럼 이미 향교란 교육 기관이 있는데 뭣 때문에 서원이란 걸 또 만든 걸까요? 공부할 자리가 부족해서?
뭐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겠으나 본질은 조금 다른 데 있습니다. 실학의 비조로 평가받는 반계 유형원은 서원의 발생을 향교의 교육이 잘못된 데에서 찾았습니다. 향교가 과거에만 집착하고 권력에만 심취한 모습을 보였기에, 이 세태를 한탄한 뜻 있는 선비들이 그 대안으로 서원을 만든 것이라 말했지요.
그 말대로 서원이 처음 발생하던 즈음의 향교는 부패한 훈구파의 지방 근거지와도 같았습니다. 은퇴한 훈구 대신들이 지방으로 내려와 향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지요. 이에 훈구와 대척점에 선 사림들이 서원이라는 독자적인 교육기관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학맥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순수한 학문을 닦기 위한, 그야말로 학교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곳이 서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훈구가 몰락하고 사림이 득세하며 그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지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향교의 관리가 제대로 안된지라, 서원이 지방 향촌을 이끄는 역할도 도맡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게 너무 비대해졌는지 하나둘씩 문제점이 나타납니다. 앞서 서원을 사립대학에 비교했는데요, 실제로 서원의 부작용을 살펴보면 사학재단 비리와 비슷한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학연을 이용한 밀어주기, 뇌물을 통한 부정입학, 파벌싸움 등등... 이 서원들이 붕당의 토대가 된 것이지요.
게다가 서원이란 게 제사도 겸하는 만큼 자기 학파의 영수를 높이기 위해 17세기 이후부터 점차 마구잡이로 지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기까지 했지요, 그러니까 뭐 율곡대학 원주캠퍼스, 송도캠퍼스, 퇴계대학 안동캠퍼스, 안동캠퍼스 2호, 대충 이런 느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양반들이 자기 조상 좀 높여보겠다고 별 업적도 없는 조상 이름으로 서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하여간 마구 만듭니다. 조선 말기 난립한 서원의 숫자가 무려 1,000여 곳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면 서원에 딸린 토지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서원의 노비는 나라의 역을 지지도 않았지요. 당연히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서원이란 게 지방에서 끗발 좀 날리는 집단인지라 애꿎은 백성 불러다가 잡무를 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은 내부에 만력제(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관장하는 만동묘까지 있어서 세기말 최종병기급의 파괴력을 자랑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자기들 제사 올리는 데 드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부담시킬 정도였지요. 비용을 내지 못하면 잡아다가 폭행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까지 퍼졌을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런 폐단을 보다 못한 숙종이 적당히 좀 하라고 면박을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쳐지지 않자 영조가 몇 개의 서원을 철폐한 일도 있지요, 그래도 폐단은 여전했습니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에는 세도가문 독재로 붕당이 붕괴되어서 서원이 정치에 간섭하는 일은 사라지게 됐으나, 지방 서원의 양반들은 경제력을 부여잡고 고을에서 여전히 큰 소리를 친 것입니다.
결국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이 나섭니다. 가장 폐단이 심했던 만동묘를 시작으로 사액서원(국가에서 현판을 내린 서원) 47개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박살내지요.
유생들의 반발이 엄청났지만... 은 아니고 자기들도 폐단이 심각한 건 알아서 별 반박을 하지 못합니다. 서원을 아예 없애는 게 아니니 성현에 대한 모욕이라 볼 수도 없고, 공부할 곳이 없어진다면 향교 가서 하면 되니까요. 서원에 소속된 유생들은 분만 삭혀야 했지요.
훗날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을 때 유생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철폐한 서원을 부활시켜달라고 상소가 마구 올리게 됩니다. 물론 이때도 없어진 1,000여개 서원을 다 부활시키라는 소리는 못하고 상징적인 서원 몇 개만 부활시켜달라는 청원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유생들의 요구를 쿨하게 씹습니다. “니들은 서원이 없으면 성현 존중할 줄도 모르냐?”며 면박을 주기도 하지요. 만동묘를 부활시키기는 했는데 이마저도 제사 주관을 지방 양반이 아닌 관아의 통제 아래 둬서 예전 같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게 했습니다. 대원군도 고종도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지만 서원철폐에 한해서만큼은 분명한 치적으로 인정받지요.
정리하자면 서원이란 건 시작은 좋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작용만 늘어난 곳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타락한 향교에 대한 대안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서원도 타락해버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