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위정편에 등장하는 내용중에,
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시지야
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
라는 것이 있다.
해석하자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라는 의미이다.
孔子(공자)가 제자인 子路(자로)에게 말하는 내용 중에도,
지(知)와 무지(無知)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이 있다.
공자는 무술이 뛰어나고 용기가 지나친 제자 자로에게 강한 충고를 한다.
“한 마디로 裁判(재판)의 판결을 내릴 사람은 由(유)밖에 없다.”고 했다.
由(유)야, 네게 아는 것을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에서 부터,
아는 것이 시작됨을 깨달은 현자였다.
그는 지혜의 본성이 절대적 신(神)의 지(知)에 비교한다면 무(無)와 같다는
것을 명확하게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본래적(本來的)인 지(知)의 이데아에서 자기의 무지(無知)를 자각하는 것이
다름아닌 무지(無知)의 지(知)이고,
소크라테스의 뛰어남은 이에 대해여 깊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지(無知)의 지는 소극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사리(事理)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이는
대중들의 미망(迷妄)을 밝혀주어 진실한 지(知)에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곧 인식의 문을 열고 이데아의 세계를 보는 것이리라.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집단을 이루어 힘을 과시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모른다로 전락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 기득권이 되어 자신이 아는 것을 옳다고 주장할 때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직면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종말이 있다.
그 안다는 것에 갇혀 평생을 자신의 앎이라는 알 속에 갇혀 살다가
그 앎의 알 속에서 세상 밖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의 별에 이름 하나를 지었다고 해서 지식인이 아니며,
후대에 그 별이름을 배웠다고 해서 지식인이 아니다.
내가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 중에 겨우 그것을 아는 것이기에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랑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사랑은 존재를 감추게 되고
그 자리를 교만이 채우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사랑에 대하여 알아가는 것이고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며, 그 안다는 것은 비로소 사랑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면서 모름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