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은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며 작자와 정확한 창작 시기등은 알 수가 없다. 욕심 많은 형 놀부와 가난하지만 착한 동생 흥부의 이야기로서, 해학과 풍자가 뛰어난 작품이다.
옛날에 전라도와 경상도가 맞닿는 어느 고을에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동생인 흥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제 형제를 사랑으로 대했다. 하지만 형 놀부는 욕심이 많아서 허구한 날 심술을 부려서 같은 부모에게서 났지만 성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고 한다.
고전소설로서만 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놀부가 심술궂고 못된 놈이라서 제비다리를 부러뜨려서 치료해주고는 복받으려고 해서 결국에는 쫄딱 망한다는 식의 스토리로만 기억을 하겠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현대적 관점에서 흥부와 놀부를 비교해본다면 놀부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왜냐고? 당연히 조선시대의 착함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과 오늘날 현대식 자본주의적 관점에서의 착함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적 변천에 따라서 문화적 인식도 변화되어지고 가치관도 변화된다. 고전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착하다 선하다의 개념 역시도 당연히 시대적 변화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인식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흥부와 놀부의 고전소설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착하게 살아간다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적인 전인류적인 가치관으로 확장되어져 가고 있는 시대에도 당연하게 똑 같은 원리로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냐는 것은 뭔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흥부와 놀부가 살던 시대에는 한 집안 이웃마을이라는 협소적인 개념으로서만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 시대의 가치관이 오늘날의 국제적 이동의 다문화적 삶의 시대에도 똑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왠지 모순적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서, 놀부는 집안일은 잘 안하고 남 일에만 발 벗고 나서면서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짓을 자꾸하니까, 결국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놀부가 생트집을 잡아서 흥부네 식구를 쫓아냈다고 하는데,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오히려 올바른 것이 아닐까? 자기집안 식구 건재하려고 자기식솔들 우선적으로 챙겨야지 집안일 팽개치고 남의 집안을 돌봐주는 그런 멍청하고 분별없는 짓을 왜 했던건지?
쫓겨난 흥부네는 고향 근처의 복덕촌에 자리를 잡고 살았는데, 내외가 밤낮으로 일을 해도 돈을 한푼도 모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만은 부자여서 스물아홉을 낳았다고 하니, 아이들이 음식타령을 하면서 생떼를 써대는 것이 가관이었다고 한다.
자기 주장도 똑똑하게 하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멍청한 것이지, 과연 그것이 착한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돈을 벌려면 정당한 댓가를 올바르게 챙길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 일만 해주고 댓가도 못 받는다는 것은 생각이 모자라는 바보병신이라는 것이지 이것이 과연 착하다는 것일까?
생각 없고 무식하고 멍청한 것들이 자식농사는 잘 짓는다고, 전형적인 무식한 자들의 자식 줄줄이 낳기는 참으로 대견스럽기만 하다. 먹고 살 땟깔이 없는 집안이면 당연히 자식농사를 줄여야 정상이지, 집구석에 밥 한그릇 옳게 나올 구멍이 없는 주제에 스물아홉이나 낳아서 기른다는 것은, 그 후대에 자식들 살아가는 것은 그 꼬라지 역시 뻔했을 것이다.
하도 먹고 사는 일이 해결이 되지 않자 결국은 놀부에게 찾아가는데, 흥부가 살려달라며 먹을 것을 청하자 몽둥이찜을 해버리고 놀부마누라는 밥 주걱으로 흥부의 빰을 후려쳤다고 한다. 그런데 흥부가 명청하고 자기 주제도 모르고 분별없이 세상을 살아가니까 형인 흥부가 하도 답답하고 속이 터져서 너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능력을 쌓으라고 오히려 몰매를 하면서 내쫓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놀부 마누라가 흥부의 빰을 밥주걱으로 후려쳐서 내쫓은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라고도 생각이 든다. 마치 더 큰 사랑으로 매몰차게 내쳐서 더 큰 것을 깨닫게 만들려는 근엄하고도 매서운 아버지의 큰 마음처럼 말이다.
흥부내외는 서러워서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하다, 때 마침 스님이 흥부네 집 근처를 지나가던 중에 그 사정을 다 듣고는 좋은 집터를 하나 잡아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흥부는 스님이 잡아준 터에 수숫대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다음부터 차츰 살림이 나아졌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아무리 가까운 부모형제라도 결국은 남남이고 각자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있어야 하거늘, 결국은 매몰차게 내쫓은 놀부덕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첫 단추가 어느 스님의 도움을 받게 되어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 도움이라고 해본들 실질적으로 쌀을 주고 옷을 주는 식의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식의 인생조언이었을 뿐인데,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을 해서 살림이 나아졌다고 한다. 만약 놀부가 멍청하게 착하기만 하면서 남의 말을 아니꼽게 여기면서 잘 듣지도 않는 고집이 아주 세고 멍청한 착함만 있었다면, 정말 인생 필 날이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봄이 되자, 흥부네 집 처마에 제비 한쌍이 날아들더니 집을 짓고 알을 낳아서 새끼를 쳤는데, 어느 날 구렁이가 제비새끼들을 잡아먹는 것을 본 흥부가 서둘러 구렁이를 쫓아내고 겨우 제비새끼 하나만 구했다고 한다 . 흥부는 그 제비를 정성껏 보살펴주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 제비가 날기 연습을 하다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고 만다. 흥부는 그 다리를 명태껍질과 명주실을 구해다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가을이 되어서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 제비왕에게 사연을 이야기하자, '보은표' 라는 박씨 하나를 흥부에게 갖다주어 은혜를 갚으라고 했다. 다음 해에 봄이 되어서 다시 흥부의 집을 찾은 제비는 흥부앞에 박씨를 떨어 떨어뜨려주고 갔는데, 그 해 추석에 커다랗게 자라난 그 박을 잘라보니, 그 안에서 수많은 보석이 쏟아져 나와서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아주 잘 살게 되었다.
이 부분은 충분히 착한 일에 대한 인과응보적인 차원에서도 납득이 간다. 흥부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궈서 집을 짓고 살면서 제비를 정성껏 치료해주고 남에게 도움을 준 것이 큰 덕이 되어서 살림이 아주 좋아졌다는 것은 교훈적으로는 아주 배울만한 것이겠다.
하지만 이것 역시 흥부가 놀부에게 빌붙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겠으니, 모름지기 스스로의 삶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면서, "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라는 명언을 실천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작은 노력의 결실이 이렇게 큰 하늘의 축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진정한 자연의 섭리이겠다.
갑자기 흥부가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놀부는 심통이 터져서 자기도 제비에게서 박씨를 얻어보겠다고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치료해주고는,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주기를 기다린다.
이듬해 봄에 그 제비가 놀부에게 찾아와서 박씨를 하나 주고가기는 하는데, 나중에 그 박씨가 커져서 잘라보니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보석이 아니라 이상한 거지와 병신들, 도깨비들만 잔뜩 나와서 놀부네 집안을 졸짝 망하게 만들어버린다.
솔직히 이런 면에 있어서는 놀부가 벤치마킹 전략에 있어서 실패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남이 잘 되는것은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특수한 환경과 기회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그것이 결코 다른 남들에게까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자신만의 특수성을 파악해보고나서, 그에게 맞는 투자전략을 구사했어야지, 제비다리를 부러뜨릴 정도의 무리수를 두는 것은 치명적인 손실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겠다. 그래도 어쨋든 간에, 자기가 직접 제비다리를 부러뜨려놓고서는 나중에는 다시 치료해주면서 자기가 생명의 은인인양 둔갑할 줄도 아는 비상한 속임수는 참 배울만한 훌륭한 지략(?)이기도 하다. ㅎㅎㅎ
이 흥부전의 해피엔딩은, 결국 놀부의 박씨에서 나온 괴물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놀부가 가지고 있던 그 많던 재산이 몽땅 사라지고 없어지면서, 놀부는 그날부터 좋은 사람이 되었고 흥부는 형을 따뜻하게 위로하며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형제는 그 뒤로 지난 일을 모두 잊고 한 평생을 정답게 잘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렇듯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으니 망정이지, 혹시나 놀부가 지옥으로 붙잡혀 끌려갔다고 하면서 끝이 나면 참으로 서글픈 비극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해보자, 과연 놀부는 아주 나쁜놈이고 흥부는 아주 착한놈이었을까? 내 생각은 일반론적인 관점과는 상당히 다르다. 특히 나의 관점은 조선시대풍의 도덕적 가치관으로서의 기준이 아니라 오늘날의 현대적이고도 글로벌적인 도덕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판단을 해보려는 것인데, 어쩌면 흥부는 졸라 멍청한 착한놈이었을 뿐이고, 놀부는 아주 계산적이고 눈치빠른 투자가형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놀부가 매몰차게 동생을 내치고 박대를 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흥부는 자신의 멍청한 착함이 왜 죄악이 되는 것인지를 깨닫고 나서, 그 후에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차츰차츰 생활이 나아지면서 하늘의 축복을 내려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과거의 시대에는 내 부모형제, 내 이웃사촌, 내 민족, 내 나라 중심의 마인드가 당연한 것이었고, 그 시대의 도덕적 가치관이라는 것 역시도 이러한 사회적 틀에 맞추어진 것들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전인류적 전문화적 차원의 다차원적인 관점에서의 사회적 틀에 맞추어진 도덕적 가치관이 더 진리에 부합되는 것으로 인정되어져 가고 있는 시대이다.
이것이 어쩜 인류의식의 진화발전이자 성장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좁고 협소한 관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전지구적 전인류적인 대승적 차원으로의 사고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지금시대의 변화상이기 때문에 그 시대적 특성에 맞는 고전소설속의 착함과 악함의 분별기준도 이제는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겠다.
과거시대의 착함은, 그 기준이 분명 멍청하고 비리비리 하면서도 남에게 끌려다기기만 잘하는 것을 착하다 라고 표현하였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시대에는 대승적차원에서 더 크게 올바른 분별을 실천하여 모두가 잘 살수 있도록 만들어나가는 것이 착하다의 개념이 되어져가고 있음이다.
그래서 나는 흥부와 놀부이야기에서, 흥부를 착한 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졸라 멍청하기만 하고 자기분별도 없어서 자식들 농사 망치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귀찮게 만드는 하찮은 놈이라고 보는 것이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악착같이 잘 지켜서 주변사람들 앞에서 비굴하지도 남에게 피해주지도 않으면서, 눈치빠른 투자전략도 잘 펼칠줄 아는 자기만의 행복을 잘 추구하는 놀부를 진정한 부자로서 인정을 하는 것이다.
더 삐딱선을 타자면,,, 놀부의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문전박대가 오히려 흥부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었고 그 결과로 나중에는 아주 잘 살게 된 것이었는데, 투자전략 구사(제비다리 일부러 부러뜨린 것)에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놀부가 망하게 되자,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따른 은혜를 흥부가 알든 모르든 놀부에게 다시 갚아주어서 함께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머~~~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오버해서 해석을 하자면 쫌 이상한 것이겠지만,,,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현대사회에서는 흥부보다는 놀부가 매력적인 면이 더 많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세상을 앞서서 생각해 나가는 궤변론적인 작가의 관점이기만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