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잃어버린 세계의, 새로운 신화
신화를 잃어버린 세계의, 새로운 신화
―「신과 함께」주호민昨 ―
-구스타프 융은 조상 혹은 종족 전체의 경험, 더 나아가 원시인류이전의 시대부터 축적된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융은 이러한 집단무의식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예술이나 꿈, 그리고 여러 종족의 공통된 신화적 상징에서 찾았다. 신화, 혹은 신화적 상징을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깊은 내면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우리가 신화를 통해 깊은 내면을 인식하는 것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
현대에는 신화를 잃어버린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종교적인 부분과 동떨어진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신은 더 이상 우리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양한 개성과 미디어 매체와 소비다. 신과 영성이 사라진 공허한 틈을 차지하는 개성과 미디어 매체와 소비 중에서 미디어 매체는 과거 신의 전달자가 신의 음성을 전달하는 일종의 신탁(神託)이라고 할 수 있을진대 이러한 미디어 매체를 신화를 잃어버린 세계의 새로운 신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네이버 연작만화 주호민昨 <신과 함께>는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큰 미디어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대인에게 신화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비평해보고자 한다. -
1. 신화를 잃어버린 세계의 새로운 신화
현대의 사람들은 신화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화라는 것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머나먼 얘기일 뿐이다. 즉, 과거의 삶속에서 녹아들어 있던 수많은 신화와 민담은 현대의 일상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말하자면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퍼즐 중에서 신화라는 퍼즐조각이 하나 빠져 버린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잃어버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텅 비어버린 퍼즐조각을 메우기 위해 신화를 가장한 새로운 퍼즐을 만들어 낸다.
신화는 세계와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는 자아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곧 영웅이다. 과거의 신화에서 영웅의 역할은 타고난 비범한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의 혼돈을 정리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거나, 악을 물리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혹은 세상의 번뇌와 생명의 유한성에서 고통을 받는 인간에게 그들 내면의 신성을 일깨우고 삶의 새로운 목적을 부여해주는 역할도 영웅의 몫이었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까지도 성자(聖者)라고 부르며 종교라는 제도를 통해 숭상하거나 그의 뜻을 책으로 남겨 떠받드는 예수, 석가, 공자 같은 이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화라는 것은 과거의 신화와는 맥락이 다르다. 오늘날의 신화를 대체하는 것은 시와 소설, 혹은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미디어 매체인데, 과거의 신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교훈이나 허무맹랑한 억지스러움의 거품이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개개인의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환상적인 욕구만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영웅의 자리에는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비범한 표식을 지닌 이가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이되 다만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스타’ 또는 ‘연예인’, ‘재벌’, ‘주인공’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부른다.) 즉, 오늘날의 신화라는 것은 신성함이나 진지한 생애의 목적 따위는 사라져버린 영성이 사라진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신과 함께’는 현대의 수많은 매체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듯한 정사각형의 칸으로 나뉜 이 인터넷 연재만화는 현대의 신화에서 요구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환상적인 욕구와 더불어 신성함과 생애의 진지한 목적, 성찰을 함께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다른 신화와는 다르게 ‘신과 함께’에 담긴 신화는 오래 전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던 영성적 신화의 향수를 자극시키면서도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중들의 관심’이라고 하는 매우 추상적인 단어에 관해서다.
흔히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특정한 대상이 발산하는 오로라, 매력(그것이 나와 매우 이질적이어서 눈살을 찌푸리게끔 하는 것일지라도)에 이끌려서 그 대상에게 계속해서 눈길을 주거나, 지속적으로 그 대상을 사유하고 내 삶과 연관 짓기 위해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특정대상이 나와 다른 성별의 사람이라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던 성격이나 외모에 적합한 사람을 이르는 것이겠고, 특정대상이 직업이라면 연봉을 많이 준다거나, 근무조건이 좋다거나, 안정성이 높아서, 어쨌거나 나에게 경제적으로나 자아실현의 측면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주는 직업을 이르는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드라마나 영화, 소설 역시 여가시간을 가능한 한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도록 나에게 재미를 주거나, 욕망을 대리 실현시켜 주거나, 심적으로 위안, 교훈을 주는 대상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끌리는 흥미의 대상이나 관심은 천차만별이어서 개개인마다 추구하는 매체의 양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분모를 잘 건드리는 작품일수록 흥행작이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각적으로 자극을 주거나 지엽말단적인 쾌락으로 흥미를 이끌어내는 부분들을 싹 잘라 내어버리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스토리나 장면이 있을 것인데 이처럼 대중의 무의식을 이끌어내는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을 ‘신화적인 상징성의 현대적 발현’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화가 가진 상징성에 대해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것은 맹자가 주장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특정을 이르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나 측은지심 같은, 불의를 보면 분노하거나 불쌍한 처지에 이른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주장처럼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열망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맹자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이미 근본적으로 공통적인 선한 마음을 무의식속에 탑재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이겠고, 알튀세르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이란 어떤 관계 속에서 본성을 갖는 존재이므로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우리의 요구나 생각이 정해지는 것이겠다. 또는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대로 무의식이라는 것은 욕구와 충동, 소망으로 이루어진 대부분이 성적이고 파괴적인 성질을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적인 부분인 것만은 명확하다. 이것은 인간의 심층심리학이 발달해서 어떤 명확한 근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렇다, 저렇다고 정의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에겐 적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프면 눈물이 흐르고, 웃기면 웃음이 나고, 불의를 보면 화가 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보면 좋은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여가를 이러한 당연한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 영화나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쳇바퀴 구르듯 돌아가는 일상의 반복이어서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뉴스기사 속에서 자신과는 무관한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도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광장으로 나가거나 어떤 매체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신과 함께’의 저변에 깔려있는 대부분의 감정요소는 바로 이러한 분노와 연민의 감정이다.
2. ‘신과 함께’에 담긴 권선징악적 요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한다.’라는 글이 있다.
인류의 원초적 삶을 기억하는 각종 신화에서는 대표적인 권선징악적 요소 중에 홍수신화를 들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비롯해 하와이 토속 홍수 이야기, 아즈텍의 타타와 네나, 그리스의 데우칼리온과 피라, 이집트의 하토르의 분노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북아메리카의 여러 홍수설화가 있다. 이러한 신화는 모두 신을 섬기지 않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징벌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성주전 中)
이처럼 인간의 원초적인 삶과 그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연유한 신화는 인간이 도덕적인 관념을 가지고 살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다. 때로는 단군신화와 같은 민족의 시초/건국과 관련되기도 하고 ‘아기장수전설’과 같이 현실에서 허용되지 못한 영웅/인물의 좌절과 관련되기도 한다. 여기서도 바탕에 깔린 모티프는 권선징악이다. 단군신화에서는 100일간 마늘을 먹으면서 견뎌야 하는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한 호랑이는 동굴에 뛰쳐나가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지만 묵묵히 참고 견딘 곰은 결국 인간이 되어 환인의 서자 환웅과 결혼하여 우리 민족 신화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린다. 인내를 요구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선(善)과 악(惡)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기장수전설에 있어서도 뛰어난 인물이 뛰어난 뜻을 펼치기도 전에 그를 죽여 뜻을 펼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변의 무지를 악(惡)으로 규정한다.(누군가가 주장했듯이 아기장수전설의 뛰어난 인물상은 우리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의 측면에서 볼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내·외부의 원인, 조선후기의 민중봉기의 거듭된 실패를 악(惡)의 요소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해야 할 당연한 물음이 생긴다. 그것은 과연 선(善)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에 상반되는, 없애야 하는 악(惡)이라는 것은 어떠한 기준으로 규정 짓는가하는 문제이다.
사실상 선(善)과 악(惡)을 규정짓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행동에 대해 사람들이 갖게 되는 감정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이타적인 사건이나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감정을 만든다. 반면에 이기적인 사건이나 행동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불쾌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루어진 신화편의 대별소별전, 차사전, 할락궁이전, 성주전에는 모두 이기적인 행동으로 불쾌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에게 억압당하거나 피해를 보던 주인공들이 이기적인 인물들을 처단함으로써 결말을 맺는다.
대별소별전에서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속임수를 써서 이승을 차지한 소별왕이, 차사전에서는 새로 부임된 장군이, 할락궁이전에서는 천년장자가, 성주전에서는 소진항이 악(惡)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며 이들은 모두 자신이 지은 죄에 따라 죗값을 받는다. 악(惡)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사람, 성적인 탐욕으로 이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 능숙한 임기응변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 권력에 종속되어 인간미를 잃어버린 사람, 모두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며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을 마음속으로 처단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결국, 만화 속에 존재하는 권선징악적 요소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이 요구하는 욕망의 반영이 아닐까.
3. 약자를 위한 신화
신화는 고대의 지배층이 하층민을 다스리는데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래서 고대의 신화는 강자를 위한 이야기이다. 신화 속의 영웅들은 대게 비범한 출생에다가 뛰어난 능력을 소지하고 있어 나라를 건국한다거나 사람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현대 신화의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는 <신과 함께>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은 냉철하면서도 약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차사나, ‘지구 편’에서 등장하는 어려움에 처한 약한 인간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가택신들이다. 더 포괄적으로는 가난하고 억압받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비열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게 희생당한 억울한 사람들이다.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저승 편’에서 등장하는 무기력하지만 선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았기 때문에 49일 동안의 재판에서 승소하는 김자홍이나 ‘지구 편’에서 철거위기에 놓인 달동네 마을에서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살아가는 동현, 후자의 경우에는 ‘저승 편’에서 등장하는 군대에서 자신의 진급만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은폐시켜 억울함을 당한 군인 유성연이 해당된다.
‘지구 편’의 결말은 터전에서 내몰린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터전에서 쫓아내려는 사람들 간의 충돌 직전에서 그 끝을 맺는다. 그리고 차사들끼리의 대화 속에서 이러한 인간과 인간의 끊임없는 갈등이 멈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끝까지 인간에 대한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는 캐릭터는 차사 덕춘이다.
덕춘은 <저승편>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중심인물이면서 차사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덕춘은 다른 차사나 신들에 비해 유달리 인간적이다. 그녀는 실상 우리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저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보다도 더 여린 심성을 지녀 오히려 원귀에게 이용당하기까지 한다. 그녀는 불쌍한 영혼을 위해 손수 뜨개질 한 장갑을 씌어주기도 하고, 어려움에 처한 인간들에게 차사로서는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동정심을 베푼다.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 살았을 땐 북방한계선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았다. 우리는 덕춘을 통해 성모마리아의 한없는 동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독자들, 특히 남성독자들은 덕춘이라는 캐릭터에 큰 매력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느낀다.
이는 신화학자 조셉캠벨의 주장대로 유아기의 희비극적 삼각관계(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아들 대 아버지의 대치상태)에 얽힌 채 자기 상상 속의 은밀한 구석자리에 은거하고 있는 불운한 가장인 대다수의 남성이 어머니의 젖가슴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젖가슴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반드시 남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어 주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심지어는 가족들조차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구성원을 외면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런 불안감이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속에서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모든 현대인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염원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이다. 어쩌면 만화 속에 등장하는 재개발 지역의 빈민들을 탄압하는 불량배들조차 어머니의 젖가슴을 손에 쥘 수만 있다면 만화에선 멈추지 않는다고 표현했던 치열한 투쟁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상처받을까봐 두려워 겉으로는 강인한 척하며 자존심의 담을 쌓아올리는 현대인들은 사실상 양파껍질보다 더 얇은 담을 쌓았을 뿐이며, 담을 무너뜨리고 나면 털을 벗겨낸 닭처럼 웅크리고 있는 실상만이 남을 뿐이다.
현대인들은 그저 위로받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선 위로해주는 이도 없고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찌질이나 낙오자로 낙인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어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속의 신화를 통해 충족되지 못한 감정을 위로받는다. 말하자면 만화 <신과 함께>는 약자를 위한 신화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한국무속신화에 등장하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만든 ‘신화편-대별소별전’에서는 대별왕이 두 개의 태양을 떨어트리기 위해 지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힘을 모은다. 그리고 인품이 고매한 대별왕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힘없고 약하다고만 생각하는 백성들에게 진정한 힘은 그들에게 있음을 일깨워준다. 영민한 독자들이라면 만화 속에서 등장하는 백성들이 곧 만화를 감상하고 있는 독자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철거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은 곧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기도 하면서 나 자신의 문제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만화의 주인공은 결국 만화를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인 셈이 된다. 만화를 통해 분노감을 느끼고 연민의 감정을 품는 것은 곧 우리 주변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감정을 댓글로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만화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개개인들이야말로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신화의 주인공임을 자각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래서 신화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신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작가는 만화를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대들은 신화 속의 영웅들이며 더는 약하거나 초라한 존재라는 용어에 속지 말라, 그대들이야말로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태양을 떨어트릴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진 주체들이다. 소외받고 억압받는 주체를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
(저승편 中)
4. 신화와 자본논리의 결합
이제 저승도 근대화가 되었다. 저승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동의서에 싸인을 해서 승인을 받아야 저승입국이 가능하고, 저승으로 향하는 입구인 초군문에는 저승의 강을 건너도록 인도하는 뱃사공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하철이 개통되어 최신식 전철이 영혼을 인도한다.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는 잡상인이 보온 메리야스를 판매하는데 장례절차 때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넣어주는 노잣돈으로 물건을 산다.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 49일간의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선 변호사를 선임해야만 한다. 물론, 저승의 변호사 선임비용은 무료이다. 저승으로 인도되어 간 영혼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하지만, 생전에 남을 위해 쓴 돈에 따라 저승에서 선임하는 변호사의 질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아무리 심성이 착하더라도 능력이 없어 남을 위해 쓸 수 있는 경제력을 확보하지 못 한 사람은 염라국에서 국선변호사를 선임해주긴 하지만, 아주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능했던 사람은 아무리 선행을 쌓았더라도 죽어서 천국에 가기는 힘들 것이다’는 논리를 가지고 스토리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남에게 이로운 덕을 많이 베푼 사람은 그 대가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훈을 담았다. 실제로 무능했지만 선한 마음을 가졌던 <저승편>의 주인공 김자홍은 국선변호사를 통해서 저승의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자신을 변호한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출생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작가의 교훈적 의도 속에도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파헤쳐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논리가 사회의 악을 가져온다거나, 자본주의의 근본체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기보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진실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욕망을 투사시키지 않고 사물을 온전히 그대로 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되었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욕망은 인간 감각 중 대부분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상품의 판촉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상성을 벗어나 점점 자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부분의 대형기획사들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여자 아이돌 가수를 발탁할 때 노래실력이나 연주실력 같은 음악성보다는 얼마만큼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시킬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선발한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여지없이 등장하는 수식어는 ‘꽃미남’이나 ‘얼짱’이다. 사람을 두고 미남이나 미녀를 가르는 명확히 정해진 기준은 당연히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인물이 좋다고 평하는 사람들의 외모는 대부분 서양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늘씬하고 키가 크고 얼굴은 작고 코가 높고 신체에 비해 얼굴크기는 작으며, 피부는 하얄수록 미인의 기준에 들어간다. 아마도 이러한 기준은 자본주의사회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서양인을 선망하려는 내적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시각적 욕망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서 수능이라는 제도로 익숙해져 있는 경쟁구조도 자본주의적 욕망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슈퍼스타K>나, <나는 가수다>와 같은 쇼프로그램은 대중음악이라는 예술에 경쟁구도를 접목시켜 최고의 가수나 퍼포먼스를 골라내었다. 그런데 예술은 엄연히 유희이자 자아실현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러한 자아확장의 과정을 전문가라는 명목으로 등수를 매긴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행위자체가 예술을 예술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시를 썼는데 사람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시로써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시를 쓴 사람에겐 자신이 쓴 시는 그의 자아를 문자라는 기호를 통해 표현한 것으로 자아가 확장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시를 쓰는 기법이 조금 미숙하거나, 공감하는 사람이 적을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대중음악이라는 것도 그 시대의 사람들의 열망이나 감성을 표현하고 공감하려는 예술이다. 음반이 많이 팔리건, 적게 팔리건 상관없이 음악을 만드는 음악가들이나 그 음악을 감상하는 팬들은 음악을 만들고 듣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얻고 자아를 확장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한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과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의 음악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사실,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는 대부분의 음악들은 대중기획사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자본주의적 욕망에 부합하는 상품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죽음의 과정 또한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포장되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마저도 생전에 자선을 베풀었던 경제력의 정도로 평가되는 저승의 체계는 곧 모든 사물에 등급과 가치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작가가 만든 저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곳에 있는 천국마저도 끊임없는 경쟁구조를 통해 천사의 지위가 정해질 것이며 고등천사가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무가치하게 치부되어 버릴 게 분명하다. 천국으로 넘어가는데 성공한 영혼들은 천상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49일 동안의 치열한 법정공방에 승리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지상에서 선한 일을 많이 베푼 영혼들조차 49일 동안의 엄격한 평가기준 속에 길들여져서 그러한 영혼들이 모인 천상계는 더는 천상계가 아니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서 버텨내지 못한 취약한 영혼은 <저승편> 76화에 등장한 긴 머리로 얼굴을 가려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살귀처럼 불행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돈다.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사상가 바타유는 자본주의 문명을 생태학적으로 바라보면서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가 과잉되었다고 했다. 적절한 에너지는 생명체에게 윤택한 이로움을 주지만, 과도한 에너지는 생태계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이를 사람으로 대입하자면 아이들에게 적절한 음식섭취는 성장에 도움을 주지만 과도한 음식섭취는 비만을 초래하는 것과도 같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 과잉된 에너지에서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바타유는 덧붙여 과잉된 에너지는 반드시 파멸된다고 말하면서 과잉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과잉에너지(불균형적으로 집중된 욕망)를 어떠한 방식으로 승화시킬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자본주의적 욕망을 투사하지 않고서는 사고할 수 없는 우리의 본모습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에 자본주의적 욕망을 투사하려는 습관을 떨쳐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부터 순수한 자각의 눈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생명력으로 새롭게 사회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제작한 애니매이션 <월령공주>에서 사슴신의 머리를 차지하려는 인간들과 사슴신이 다스리는 대자연을 지키려는 신령들의 치열한 전투에서 결국 사슴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멸망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이야말로 다시 세상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듯이 우리도 자본주의적 욕망이 구축해놓은 두려움에서 온전히 벗어나 객관성을 유지하며 사물을 바라볼 때 상생으로 향하는 사회가 시작될 것이다. 그럴 때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던 희망이 마침내 상자를 뚫고 세상을 음표처럼 활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신화를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가상의 영웅을 창조하려는 것은 결코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세상이 희망적일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측하면서도 희망을 꿈꾸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신화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그 모습만을 달리하면서 언제고 우리 곁에 머물 것이 분명하다. 신화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실천하는가 하는 것은 신화를 읽는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끝>
조셉캠벨, 「천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2004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사계절, 2011, (바타유 - 유쾌한 소비의 길, 2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