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정안을 조금 지나가다가 보면 김옥균선생유허지라는 이정표가 나옵니다.
1851년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습니다. 11세 때 양부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자, 16세까지 강릉 송담서원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했지요.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1874년 교리·정언을 지냈습니다. 이때 그는 개화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유대치·오경석 등의 지도를 받고, 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나갔습니다.
그는 1882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유신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일본 정치가들과 민간 지도자들을 접촉하기도 합니다. 이를 기화로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자금력이 대단히 부족했을 뿐 아니라 정치 실세였던 민씨정권과 그 배후세력인 청의 방해로 개화파들이 구상한 개화정책의 추진은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죠. 특히 한성판윤 박영효의 좌천, 화폐주조문제를 둘러싼 의견충돌, 일본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서재필의 축출 등 집권파의 압력은 계속 가중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개화파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윤태준, 민태호, 민영목 등 민씨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군은 6일 오후 정변을 무너뜨리려고 무력개입을 시작하여 궁궐로 공격해들어 옵니다. 이결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894년 3월 민씨정권이 보낸 자객인 홍종우에게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되었습니다.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생가지는 이제는 터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이집은 그가 망명할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되고 시체를 양화진에서 효수함에 따라 누군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는 말이 전합니다. 당시 그의 생가 주위에는 약 10여호의 가옥이 있었지만 화재로 모두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를 추모하는 추모비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