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극인대상 평가단으로 활동하고 있어
매달 정기적으로 연극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6월의 작품으로는 무엇을 볼까 고민했는데
관람가능한 작품에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구요.
안 그래도 흥미가 있는 작품이었는데,
고민없이 보러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연극 '기린의 뿔'.
사씨남정기라는 책을 아시나요?
김만중이 지은 소설로,
명나라의 유연수라는 학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정옥(사씨 부인)이라는 부인과의 사이에 오래도록 아이가 없자,
교채란이라는 첩을 들입니다.
하지만 이 교채란이라는 여인이 아들을 낳고 기세가 올라가며
본부인의 자리를 탐해 사씨를 모함해 내쫓고,
끝내는 다른 사내와 통정하며 집의 재산을 탐내 유한림마저 쫓아내지만,
유한림이 사씨 부인과 재회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돌아와
교씨를 벌하고 사씨 부인과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만 들으면 전형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 이 안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그 당시의 실존인물들을 베이스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유한림은 숙종,
사씨 부인은 인현황후,
교씨 부인은 장옥정(장희빈으로 더 유명하죠)을 빗댄 인물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희빈에 의해 서인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인현황후가 폐비되고 남인이 득세하던 상황에
서인의 대표주자격이던 김만중이 시대상황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우회적으로 비판한 결과물이 '사씨남정기'라는 것입니다.
연극 '기린의 뿔'은 이 사씨남정기를 핵심 소재로 이야기를 끌고갑니다.
이
제
부
터
는
스
포
일
러
방
지
구
간
입
니
다
원
치
않
으
면
닫
아
주
세
요
줄거리
극이 시작되면 박물관 같은 분위기입니다.
무대 중앙에는 작은 조각상이 놓여있고,
한 남자가 걸어와 무대 구석에 놓인 낡은 책을 집어듭니다.
오래된 책의 먼지를 살짝 불어내고 나서
남자는 책의 한 대목을 읽습니다.
사씨남정기의 한 대목으로 추정됩니다.
몇 장을 넘겨보던 남자는 책을 들고 무대 뒤로 퇴장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남해에 귀양을 와 있는 김만중.
문득 기척을 느껴 집밖을 살피다
정체불명의 괴인으로부터 날아온 화살에 목숨을 위협받습니다.
뒤늦게 주위를 살펴보지만, 흉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며칠 후 궁궐.
장옥정과 그 오빠 되는 장희재가 궁궐 심처에서 밀담을 나눕니다.
장옥정은 한창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씨남정기'라는 책과
저자에서 떠도는 '장다리는 한 철, 미나리는 사철'이라는 노래가
자신을 음해하는 것이라며 김만중에 대해 참아누르기 힘든 분노를 표합니다.
또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쉬쉬하고 있던 장희재를 책망합니다.
장희재는 이미 백성들에게 그런 소리 못 하도록 하고 있다며 의욕을 보이지만,
생각없이 의욕만 넘치는 장희재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장옥정은 이 사태의 근원을 김만중으로 보고,
'우리에게 의심이 오지 않는 형태로 죽일 것'을 장희재에게 주문합니다.
장옥정은 이미 이 전부터 김만중에 대해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습니다.
꾸준히 인현왕후를 옹호하며 숙종의 총애를 입기 시작했던 그 당시부터
사사건건 자신을 걸고 넘어지던 대비와 서인들,
그 중에서도 그 대표격인 김만중은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드시 김만중을 처리하리라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저자거리의 전기수(조선 후기의 직업적인 소설 낭독가)의 입을 타고
사씨남정기는 들불 번지듯 퍼져나갑니다.
장소는 다시 남해.
생명을 위협받은 김만중은 남해의 현령에게 보호를 요청합니다.
지금은 귀양 온 신분이나 한 때 조정의 높은 지위를 드나들던 김만중이기에
현령은 성심성의껏 보살필 것을 약속하고 귀한 술을 바칩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술에 기운을 차리고,
이 곳에 귀양오고난 후 조카 진규가 찾아오던 날을 회상합니다.
먼 길을 걸어 김만중을 만나러 온 조카 진규.
김만중은 그런 진규에게 남해에서 쓴 여러 글을 건넵니다.
시 여러편과 서포만필, 그리고 사씨남정기가 그것입니다.
남해에 고립되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김만중에게
남은 몇 안되는 것이 바로 집필활동이었습니다.
진규는 이 글들을 훑어보다 사씨남정기를 보고,
이 글이 무엇을 빗댄 이야기인지 알아챕니다.
글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마음이
김만중에게 남아있음을 읽어낸 진규는
이 글을 적극적으로 퍼트려 세상을 흔들어보겠노라고 다짐하고
김만중의 책들을 챙겨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장면전환.
김만중이 아직 유력하던 시절.
숙종에게 강론을 하던 중 기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린의 각 부위를 왕과 왕의 주변인들에 비유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숙종은 '기린의 발'에 해당하는 자녀조차 아직 얻지 못했는데
어찌 '기린의 뿔'에 걸맞는 왕의 권위가 서겠냐며
인현왕후에 대한 불만을 넌지시 비춥니다.
그러자 김만중은 숙종에게 서두르지 말 것을 아뢰며
총애를 받고 있는 희빈 장씨가 지나친 고속승진으로
주위의 시샘을 받는 것이 걱정이라 말합니다.
숙종은 그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떤말을 들었느냐 말하고,
김만중이 들은 소문을 말하자 누가 한 말이냐며 추궁합니다.
이에 숙종을 달래며 추궁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아뢰고
'누가 한 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만, 분노한 숙종의 화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습니다.
끝끝내 입을 다문 김만중을 선천으로 유배보낸 숙종은
신하가 왕을 업수이 여긴다고 생각하며 분노하고,
왕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 마음의 허전함을 놓치지 않고 자리잡은 장옥정은
왕을 부추겨 자신의 권위를 세울 것을 권유하고
그 과정에서 서인들을 솎아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합니다.
이는 성공적으로 작용하고,
끝끝내 인현왕후를 밀어내고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합니다.
장옥정이 왕자를 낳은 덕에 숙종은 대대적인 사면을 내립니다.
그 덕에 선천에서 돌아온 김만중.
숙종은 사면으로 서인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태어난 아들을 바로 세자로 삼고자 합니다.
하지만 장옥정의 아들이 세자가 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던 서인은 여기에 대해 반발하고,
협상조차 모르는 꼬장꼬장한 서인의 태도에
숙종은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을 제주로 귀양보냅니다.
이쯤에서 끝날 법도 하지만 장옥정은
자신에게 치욕을 준 김만중 또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왕을 부추겨 그 때의 진상을 밝혀달라 말하고,
거기에 대해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극의 갈등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 시작됩니다.
송시열을 위해 숙종에게 탄원하러 가던 김만중은 장옥정과 마주치고,
서로간에는 날랜 설전 공방이 오고갑니다.
장옥정은 김만중을 '두려움을 몰라 자멸하고 말 사람'이라 칭하고,
김만중은 장옥정을 '그 끝이 훤히 보이는데 헛된 꿈을 꾸는 사람'이라 말하며
서로가 원하는 바를 넌지시 비추며 상대에 대한 감정의 날을 세웁니다.
그런 직후, 숙종이 약조한 바를 지키기 위해 김만중을 불러들이고,
김만중은 또다시 끌려가 고문과 조사를 받습니다.
자신이 믿는 '충'을 위해 임금에게 간언하고
도저히 그 말의 출처를 말할 수 없노라고 하지만,
왕의 권위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 숙종은
상대가 가진 그 '충'에 기대어
김만중 앞에 무릎을 꿇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김만중의 의지를 꺾고 대답을 듣는데 성공합니다.
대답을 들은 숙종은 의기양양하게 해당 인물들을 처벌할 것을 명하고,
김만중 또한 그 결과로 지금의 귀양지인 남해로 보내지게 됩니다.
결국 장옥정이 중전의 지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장면이 지나갑니다.
다시 남해.
장희재는 동네 아낙에게 넌지시 약을 건네며
김만중의 음식에 약을 탈 것을 명합니다.
이 아낙은 높은 분의 지시로 왔다면서 김만중의 거처에 들어
그의 음식을 담당하게 됩니다.
또다시 김만중을 만나러 온 조카 진규.
하지만 김만중은 예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반쯤 미쳐 정상과 비정상을 오고갑니다.
자신의 실토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고,
초반에 보이던 선비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습니다.
사씨남정기의 대성공을 진규에게 전해듣지만
김만중은 끝내 노모를 만나러 돌아가지도 못하고
진규의 무릎을 빌린 채 깰 수 없는 잠에 빠져들고 맙니다.
마지막 환상으로 숙종을 만나
숙종이 왕으로써 가지고 싶었던 위엄과 존경에 대해
자신이 신하된 입장으로서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간언하며
진정한 '충'에 대한 생각을 숙종과 주고받습니다.
그 뒤, 극의 초반에 나왔던 남자가 다시 나와
이후의 이야기를 덤덤히 읊습니다.
인현왕후의 복권, 장희빈의 자결..
역사의 흐름을 마저 읽어내려가고
책이 덮이고, 극은 마무리됩니다.
감상
우선 다른것보다 이 극에서 가장 마음에 든 건
배우들의 연기였습니다.
대체로 이야기의 흐름만 맞으면
배ㅇ우들의 연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인데
김만중을 맡은 주연배우님의 꼬장꼬장한 자태나
끊임없이 흔들리고 불안해하는 숙종,
그리고 자신의 야망을 강하게 어필하는 장옥정의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또, 중간에 전기수로 등장해 사씨남정기의 대목을 읊는 분이
특유의 흡입력으로 관객들을 잘 사로잡아
개인적으로 동경하는 '언변이 좋고 좌중을 사로잡을 줄 아는'
입담꾼 캐릭터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조연중에선 다소 어색하거나 발성이 흔들려서
대사전달이 잘 안되는 경우도 있어 조금 아쉬웠지만,
사극이라는 특수한 테마 안에서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습니다.
오히려 아쉬웠던 건 이야기의 전개.
시간순서가 복잡하게 섞여있는데 이 선후관계가 어렵습니다.
현대를 제외한 사극 파트의 장면들을 늘어놓으면 대충 이렇습니다.
김만중(해남) - 장옥정(궁중) - 김만중(해남2) - 김만중(궁궐) - 김만중(해남3)
이걸 일자로 쭉 편다고 하면
김만중(궁궐) - 김만중(해남) - 장옥정(궁중) - 김만중(해남2) - 김만중(해남3)
정도가 될 텐데, 이게 시간순서를 알려주는 명확한 지침이 없어서
장면이 전환되고 나면, 어느 정도 보면서 단서를 얻어 추리해야만
사건의 큰 순서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장면장면들은 참 재미있게 만들었는데, 큰 흐름이 거슬려서 아쉬웠습니다.
이건 별개로, 공연 후반부 김만중이 숨을 거두기 직전
환상 속에서 숙종과 이야기하는 감정이 가득 찰 장면에서
뒷좌석에서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시는 관객분이 계셔서
몰입이 확 깨지는 바람에 좀 힘들었습니다.
직접 그렇다고 들은 건 아닌데 바람 새는 소리가 나도록
기침을 가라앉히질 못하시는게 환자분이신가보더라구요.
안타까운 일인데, 당장은 저도 극 후반부의 몰입이 깨져서
후반 5~10분정도는 집중을 잘 못했던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전 공연에서 핸드폰때문에 문제가 생겼었다고
입장할 때 휴대폰 끄는 것까지 검사하시던데
이런 일이 생기는 거 보면 무사히 공연관람하기는 그냥 운인가 봅니다..ㅠ
여하간 공연 자체는 재미있게 봤고,
같이 본 친구도 상당히 만족해서 데려간 입장에서 뿌듯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김만중 역의 정의갑 배우님은
영화나 드라마에도 출연을 많이 하신 분이시더라구요.
특히 사극 출연이 많은 분이셔서 그런지
사극의 분위기를 잘 살린 연기가 돋보였습니다.
세 줄 정리
장점 : 연기가 돋보인다.
단점 : 극의 흐름이 좀 아쉽다. 소극장 특성상 좌석이 불편한데 비해 상연시간이 길다.
총평 : 충분히 추천할 만한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