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약국 - 上 링크
https://steemit.com/kr/@torax/5pqyrf
동네약국 - 下
하지만 마음속의 희망과는 다르게 카드를 내민 내 손은 떨리고 있었던 것 같다.
“저... 카, 카드 받나요?”
정정하겠다. 목소리도 떨고 있었던 것 같다.
“...”
약사 할머니는 말없이 2초 정도 내 눈을 빤히 바라보셨다. 돌이켜보니 그냥 보신 것 같은데, 당시에는 나를 노려보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살며시 눈을 깔고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 2초의 적막이란... 어휴.
아마도 내 생에 가장 길었던 2초가 아닐까?
그래도 약사 할머니는 카드로 결재를 해주셨고, 나는 감사하다는 말도 못하고 도망치듯 약국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그 약국의 첫인상이었다.
그 날 이후 10년 하고도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강산도 바뀐다는 세월 동안, 나 역시도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어른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담배를 배우고, 몇 번의 연애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심지어 자그마한 가게지만, 창업도 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 역시도 변해갔지만, 주변의 풍경 역시 하나 둘 변해가고 있었다.
낡은 건물 몇 채는 헐어버린 다음 새로 지어졌다.
자주 가던 만화 대여점은 피아노 학원으로 바뀌었고
허름했던 골목길에는 벽화거리가 조성되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갔고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십 수 년 동안에, 나는 때때로 동네 약국을 찾았다.
대학생 시절 시험 전날 지독한 감기에 걸려 감기약을 사먹었을 때
음식점 주방에서 일하다 화상을 입어 화상약을 샀을 때
친구 결혼식 축가 연습하다 목이 부었을 때
여자친구 생리통 때문에 진통제를 사러 갔을 때...
돌이켜보니,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겪었을 때
나는 항상 동네 약국을 찾았었다.
그렇게 찾아간 동네 약국에는, 할머니 약사 선생님이 계셨다.
때로는 다른 할머니들과 수다를 떨다가
때로는 손주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있다가
때로는 구석에서 손수 싸 온 도시락을 먹다가도
약국 유리문에 달아놓은 종소리가 울리면
약사 할머니는 카운터로 돌아왔다.
항상 같은 그 자리에서
나는 약사 할머니에게 약을 사곤 했었다.
몇 년 전 감기약을 사러 갔던 어느 날.
나는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계산할 때에야 깨달았다.
어른이 된 나의 귀차니즘은 여전했고, 뻔뻔하니즘은 한층 발전해 있었다. 나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주머니를 더듬으며 말했다.
“어라... 지갑을 아, 안 가져왔네...”
정정한다. 발전은 개뿔.
어른이 되어도 동네 약국에서의 나는 여전히 그 때의 그 눈 깔던 소년이였다.
약사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음에 줘요.”
엥?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약사 할머니를 보았다.
약사 할머니는 참 따스하게 웃고 계셨다.
십 수 년 동안 거의 보여주지 않던 미소였다.
.
.
.
동네 약국의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그 때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았다.
혹시라도 내가 집에 갔다 다시 나올까봐 그녀는 그렇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준 거였다.
난 괜찮으니까, 감기 때문에 몸도 안 좋은데 얼른 집에 들어가 보라는. 그런 의미의 미소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약국의 낡은 유리문에는 도화지가 붙여져 있었다.
'32년 동안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라는 문구가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적힌 글씨를 보고, 나는 울컥해지고야 말았다.
-약사 올림.
나는 잔뜩 센치해져서는 끊었던 담배도 하나 사서 꺼내 물었다.
찬바람에 파카를 고쳐 입고 라이터에 불을 붙이자 꾸리꾸리한 담배 연기가 잔뜩 퍼져나갔다.
그렇게 담배 한 개피를 피우며 문을 닫은 동네 약국을 보고 있자니 오만가지 감상에 젖어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러고 보니 이 약국 이름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냥 동네 약국이라고만 불렀지, 한 번도 이 약국의 진짜 이름으로는 불러본 적이 없었다.
“풉!”
약국의 간판을 본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웃으니 담배 연기가 목에 걸려 목이 따가웠다. 나는 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간판을 봤다.
‘성원 약국’
동네 약국의 이름은 성원 약국이었다.
‘32년 동안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원 약국이라서 성원에 감사드린 거구나.
나는 키득거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신선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온다.
차가운 공기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느새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때 약사 할머니가 지어주었던 것처럼 따스한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