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두산백과의 설명을 부분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850년 간행. 17세기 중엽, 청교도의 식민지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17세기 미국의 어둡고 준엄한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죄지은 자의 고독한 심리를 묘사하였다. 치밀한 구성과 심오한 주제 등으로 19세기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주홍글씨'임을 알 것이다.
일단 소설의 흐름에 몰입해서 읽고 인물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 2년간 소식없는 남편을 잊고 목사와 간통한 헤스터 프린.
- 헤스트 프린과 간통하고도 함구하며 죽기 직전까지 내적 죄책감만 느끼는 딤스데일목사.
- 2년만에 나타나서 헤스터 프린의 남편임을 숨기고 간통을 한 아내 헤스터 프린과 딤스데일 목사에게 고도의 복수하는 로저 칠링워스 의사.
- 앞뒤가 다른 청교도의 모습과 당시 사회지도층의 언행불일치를 보여준 존 웰슨 목사와 벨링햄 지사.
- 헤스트의 도움을 받고도 그녀의 부정을 비난하고 헐뜯는 마을 주민들.
- 헤스터 프린의 축복이자 형벌적인 존재인 그녀의 딸, 펄.
이 책에 대한 많은 독자들의 글들을 보면 당시 청교도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특히 처형대 위에서 강제적으로 수치심 느끼게 한 형벌이나 간통을 상징하는 주홍글씨를 평생 가슴에 달게 한 것들에 대한 비인도적 모습을 많이 비판했다.
그러나 나는 소설에서 보여준 청교도에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그 시대는 그럴 수 있다고 보았다.
대다수의 대중이 그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들(목사, 재판관, 사령관 등)이 올바름과 그름, 죄와 형벌, 준수해야할 규범 등을 결정하는데 동의했기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헤스터 프린이 간통한 죄로 아이와 함께 처형대에서 3시간 동안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고정된 채로 있게 한 것도.
평생을 간통을 뜻하는 A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다녀야 하는 것도.
지금의 기준으로는 비인도적인 조치지만 당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이 소설을 정리하면서 첫 째로 화가 났고, 둘 째로 인간이 인간의 죄를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 함께 정리할 수 있었다.
먼저 나를 화나게 한 것은 대중들이 존경한다는 인물들의 행태들이다. 자신들이 만든 엄격한 청교도 정신들을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 모습들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분노했다.
소설에서 그들은 검소함을 설파하면서도 본인이 누리는 풍요로움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지도층은 공식행사와 의식을 화려하고 격식있게 진행하기 위해 청교도 정신을 위반한 헤스터 프린의 바느질 실력을 빌렸다. 그러면서도 청교도 정신에 반하는 자신의 탐욕을 반성하기는 커녕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죄를 뉘우치고 있는 헤스터 프린을 비난한다...
그뿐인가. 정직함과 죄에 대한 뉘우침을 설교하면서도 데일목사는 헤스터 프린과 그 아기와 함께 처형대에 함께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스터 프린은 딤스데일 목사가 보는 앞에서도 끝까지 아이의 아버지가 딤스데일 목사임을 밝히지 않았다. 물론 이후부터 딤스데일 목사는 건강을 해칠 정도의 양심의 가책을 항상 느꼈고, 죽기 전에 대중 앞에서 죄를 고백했다. 그러나 나는 딤스데일 목사가 본인의 죄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정한 청교도인이었다면 헤스터 프린과 함께 벌을 받아야 했으며, 스스로 청교도 정신을 연설할 자격이 없다며 목사직을 그만 두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가책만 느꼈을뿐 죽기 직전까지 목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이처럼 청교도의 비인도적 행동들보다 특정 사상 또는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언행일치가 안 될 때 큰 분노를 느꼈다. 내가 소설을 통해 분노를 느낀 이유는 현실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가 오죽 지켜지지 않으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대중들 사이에서 회자될까...
그리고 이 책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데.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인간의 죄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인간들보다 조금 덜 불완전한 인간이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아니 더 나아가서 판단해야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교류하며 사는 이상 인간은 순리, 자연스러움, 정의, 올바름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행위태양을 공유한다. 그것이 관습이든 법률이든 도덕이든 무관하게.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원수를 명예회복을 위해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사람은 희박하다. 우리는 원수라고 해서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는 순리, 자연스러움, 정의, 올바름 등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공유된 생각이다. 그런데 누군가 원수를 죽였다면 그의 행동은 사회와 집단 내에서 순리왜곡, 비자연스러움, 불의, 그름이라는 결과를 부른다. 사회와 집단은 그 결과가 가져올 부정적인 영향들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만약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그 영향은 계속해서 사회와 집단에 미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살인이 없었던 것과 같이 완벽하게 바로 잡을 수는 없어도 최대한 바로 잡을 수 있는 덜 불완전한 인간에게 판단을 맡길 수 밖에 없다. 단지 소설 속 배경에서는 그 판단을 지사, 목사, 재판관, 사령관이 한 것일 뿐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면서 기존에 사회와 집단이 공유하던 생각이 진정으로 순리, 자연스러움, 정의, 올바름 등이었는지도 다시 판단함으로써 인류는 오판가능성을 최소한으로 하며 진보해왔다고 생각한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한 첫 단추는 첫 걸음을 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두 번째 걸음을 뛰는 것이다. 완전함에 도달하는 첫 단추는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이다.
- "주홍글씨"에서 일부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