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유방과 항우 (살아남어라)
유방과 항우의 초한전에서 유방이 초패왕이라 일컫는 무적의 항우를 패퇴시키고 천하를 얻어 한나라를 세웠다. 당시 전력은 항우군이 월등히 우세하였음에도 패한 원인에 대해 많은 역사가들이 거의 비슷하게 분석하고 있다. 유방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개선하여 자신의 승인(勝因)과 항우의 패인(敗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막사안에서 계략을 짜서 승리를 천리밖에 결정짓는 점에서는 나는 장량을 따를 수 없다. 내정의 충실, 군량의 조달,보급로의 확보라는 점에서는 나는 소하를 따를 수 없다. 백만대군을 자유자재로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는 한신을 따를 수 없었다.
이 세사람은 모두 걸물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들을 잘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천하를 얻었다. 항우도 범증이란 걸물이 있었으나 그는 이 한 사람조차 잘 부리지 못하여 나에게 패한 것이다.」
여기서 소하, 장량, 한신은 한나라 개국의 일등공신으로서 창업삼걸로 불리우는데 이들 개인의 능력은 유방을 훨씬 능가하였으며 그런 유능한 부하들을 유방은 적절히 잘 부렸다는 것이 유방의 승인이라 한 것이다.
유방이 부하를 부리는 데는 몇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부하의 의견에 귀를 잘 기울인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일 없이 부하의 의견을 잘 듣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부하에게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린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쟁을 하여 승리하면 전리품이 들어오는데 유방은 이를 한푼도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어 성공에 대한 보상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개인적으로 유방보다 유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하고 부하를 의심하여 범증같은 천하의 모사를 잃었으며, 전리품이 들어오면 모두 혼자서 독차지하고 부하에게는 나누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펌) 대한민국 대표 웹호스팅오늘과내일
창업 삼걸
유방에게는 소하, 장량, 한신 창업 삼걸이 있었습니다. 유방이 창업 삼걸의 의견을 존중도 하였지만 유방은 헛점도 많은 사람이였습니다.
항우는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의 숙적이었는데도 사마천은 버젓이 유방의 고조본기 위에 항우본기에 기록했습니다.
아마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가 기록했다면 본기(本紀)에 올려놓는 것은 고사하고 열전(列傳)같은 곳에 넣었을 것이고 그 제목 또한 '항추(項酋)'나 '위초(僞楚)' 등으로 격하시켰을 것입니다.--항추란 항우란 두목자식, 위초란 헛깨비 초나라 출신 놈팽이 정도의 뜻.
한편 항우를 기록한 내용을 보자면 비록 포악한 성격이 드러나면서도 순진하고도 정이 많은 면모가 특별히 부각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항우의 말로를 기록한 대목에 이르면 읽는 이로 하여금 항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유방은 음험하고도 위선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어 있습니다.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를 묘사한 부분은 더욱 신랄합니다. 유방이 죽자 그의 애첩이었던 척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에 이르자 사마천은 여태후의 아들 효혜제의 입을 빌어 「이건 사람의 짓이 아니다」며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헛점이 있었기에 창업 삼걸이 옆에서 같이 일할 수 있었지만 한나라가 세워진 후 유방의 위선은 나타나고 장량은 떠났고 한신은 토사구팽을 당했습니다. 가족 같았던 소하만 남았습니다.
항우는 자신의 장점을 이용하지 못했고 유방은 자신의 약점을 잘 이용했습니다. 사마천이 보기에 항우는 포악하지만 순진한 인간적인 사람이였고 유방은 사람을 잘 사용했지만 사용이 끝나면 토사구팽을 시켰습니다. 위선적인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전쟁을 치룬 항우보다는 비겁하지만 살아남은 유방이 천하를 제패했습니다. 역사의 승리자는 **
**똑똑하거나 현명하거나 힘이 좋은 인물이 아니고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살아남아야 기회가 찾아옵니다. **
**특별히 유방은 그런 선례를 남겼습니다. 살아남어라! 꼭.. **
소하 [蕭何, ?~BC 193]
장쑤성 패군 풍현 출생. 한신 ·장량 ·조참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신이다. 진나라의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고조 유방이 무위무관일 때부터 접촉을 가졌다. 유방이 진나라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종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객원으로서 따르며 모신으로 활약하였다.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하자 진나라 승상부의 도적를 입수하여 한나라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찬후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일족 수십 명도 각각 식읍을 받았다. 뒤에 한신 등의 반란을 평정하고 최고의 상국에 제수되었다. 재상 시절 진나라의 법률을 취사하여 구장률을 편찬하였다.
장량 [張良, ?~BC 186]
자 자방. 시호 문성공. 한나라 명문 출신으로, BC 218년 박랑사에서 시황제를 습격했으나 실패, 하비에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나라의 고지인 관중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소하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그 공으로 유후에 책봉되었다.
한신 [韓信, ?~BC 196]
회음 출생. 진나라 말 난세에 처음에는 초나라의 항량 ·항우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아 한왕의 군에 참가하였다. 승상 소하에게 인정을 받아 해하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한군을 지휘하여 제국 군세를 격파, 군사면에서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제왕, 이어 초왕이 되었다.
그러나 한제국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씨 외의 다른 제왕과 함께 차차 권력에서 밀려나, BC 201년 회음후로 격하되었다. 한신은 한고조(유방)를 원망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남겼다.
BC 196년 진희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탄로나자 여후의 부하에게 참살당하였다. 불우하던 젊은 시절에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