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해서: 삶 푼수 = 삶 돈수
벼락같은 은혜: 돈오 돈수
천주교에는 세례 받은 신자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신부님를 통하여 하느님에게 고백하여 용서받는일을 고해성사라고 부릅니다. 고해성사가 끝나면 신부님이 묵주기도를 몇 번 하라고 답해주십니다. 많은 경우 형식적으로 흐를 때가 많습니다. 고해성사를 규칙적으로 하게 되여 있지만 그것도 적당히 형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의미입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돈오: 돈 (단박에 망념을 없앰) 오 (얻은 바 없음을 깨달음)
진짜 돈오를 하면 돈오를 한 것도 잊어야 하는데 돈오를 경험하면 돈만 기억나고 오는 잊어버립니다. 고민의 시작입니다. 이제 돈오를 다시 얻는 돈수와 점수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천재들이 걷는 돈수의 길이 있고 보통사람들이 겪는 점수의 길이 있습니다.
돈오 돈수: 성철
깨달음은 그 자체로 궁극적인 경지이기 때문에 다시 더 닦아야 할 이유가 없음. 만약 다시 더 닦아야 한다면 아직 덜 깨달은 것임.
돈오 점수: 지눌
단번에 깨쳤다고 할지라도 아직 습기 (과거의 잘못된 습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함 , 따라서 보살 행을 통한 점진적인 습기의 제거가 필요하다는 주장
회개는 벼락과도 같은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오돈수이고 고해성사는 돈오점수 같습니다. 점수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숙성하고 터져서 혹시 돈수가 될지도 모르죠!
그때까지는 돈수와 점수가 다릅니다. 돈수와 점수가 같아지면 돈수니 점수가 필요 없어집니다. 그때는 다른 단어들이 필요 없어집니다.
벼락같은 은혜인 회개.구원과 고해성사가 같아지고 깨달음과 해탈도 같아지고
벼락같은 은혜를 통해서 깨달음과 구원을 동시에 받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성령이 임하며 천국을 경험하고 신을 만나 구원을 받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망령을 잊고 삶 자체가 깨달음이며 해탈임을 인식하는 겁니다.
드라마 '또 오해영'
요새 드라마 '또 오해영'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방송은 끝났지만 다시 보기로 몰아보고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 돈수인 '또 오해영'과 사랑을 해도 사랑 점수인 '오해영'이 있습니다.
사랑 돈수인 또 오해영은 푼수입니다. 사랑을 하면 뭐든지 다 줍니다.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사업이 망해서 감옥에 가야 하기에 결혼해야 하는 여자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갑자기 밥 먹는 것이 꼴보기 싫어져서 결혼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감옥에 가고 여자는 죽을 만큼 괴로워 합니다.
부담주기 싫어서 그랬다고 남자는 말하지만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담은 주기 싫은데 상처는 주고 싶니!'
그렇습니다 여자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고 남자는 멋있고 싶어합니다. 남자는 가오를 잡고 싶고 쿨하게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여자는 모릅니다.
여자는 현실적인 사랑을 원하고 남자는 비현실적인 가오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아는, 생각하는 100%와 당신이 알고 있는 생각하는 하고 싶은 100%는 영원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모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돈수를 하는 푼수와 사랑 점수를 하는 가오를 좋아하는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책으로 배워서 그러는지 사랑 점수를 하는 편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져도 터질 정도는 아닙니다. 삶도 그렇게 삽니다. 삶 푼수로 살아도 되는데 그게 안됩니다. 적당히 천천히 대충 대충 삽니다. 삶을 가오 잡고 삶 점수로 살아갑니다.
푼수와 돈수가 같다는 것이 너무 신기합니다. 가오와 점수가 같다는 것도 신기하고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푼수와 돈수가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
삶 푼수는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갈까요?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힘빼고 생각 줄이고 그냥 사랑하고 그냥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