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칠서: 당태종이위공문대 (당태종과 이위공 이정의 질문과 대답)
원래 명칭은 《당태종이위공문대》다. 이를 줄여 흔히 ‘당리문대’ ‘이정문대’ ‘이위공문대’ 등으로 부른다. 크게 줄여 《문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문’은 당태종의 질문, '대’는 이위공 이정의 대답이라는 뜻이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은 '이위공문대’다.
《당리문대》의 주인공인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599년 1월 23일에 태어났다. 부친은 북주(北周)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 이연이었다. ‘당’이라는 국호는 여기서 나왔다.
어머니 두씨 역시 선비족의 귀족이었다. 중국인들은 당태종을 선비족과 한족의 혼혈로 보고 있으나 그는 순수 선비족에 가깝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626년부터 23년간 재위했다. 천하통일은 628년에 이루어졌다. 특히 이 시대는 중국 남북조와 수나라를 이어오면서 혼란기를 마감하고 미증유의 발전을 이룩한 시기였다. 그의 즉위는 친형과 아우를 죽인 ‘현무문의 변’에서 시작되었다. 형제의 피를 뒤집어쓰며 보위에 오른 그는 현재 청조의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패륜적인 모습으로 보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후 그가 펼친 정사만큼은 매우 뛰어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고조 이연은 건국 직후 성급하게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차자 이세민을 진왕에 봉했다. 장남 이건성을 태자로 봉했던 결과다. 4남 이원길은 제왕에 봉했다. 3남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건성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어질고 관대한 성품을 지녔다. 이와 정반대로 이원길은 모든 것을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오직 이세민만이 용맹과 과단성을 지닌데다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행보할 줄 알았다.
선비족의 전통에 따르면 장유유서의 서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능력이 우선이었다. 그렇다면 군웅을 모두 제압한 뒤 그 공에 따라 태자를 선정하는 것이 순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좋아한데다 배짱도 있고 결단도 빨랐던 이세민은 후사가 되어 보위를 잇고자 하는 집념이 매우 강했다.이건성을 태자로 책봉한 현실을 용납할 리 없었다. 이것이 결국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이세민은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이미 재력을 기울여 각지의 호걸과 교분을 쌓았던 바 있다. 천하를 얻기 위한 수순이었다. 기병 단계에서도 이연은 시종 신중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세민은 부친을 거듭 설득하며 봉기를 재촉하는 등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 조바심을 냈다. 군웅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방의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천하의 절반은 그가 탈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가 세운 무공이 뛰어났다.
현무문의 변은 보위 승계를 놓고 벌인 황자 간의 참극에 해당한다.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경우 비난을 받을 소지가 너무 많다. 그러나 역사를 도덕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적 현실은 동기보다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천하의 강산과 역사는 승리자의 몫이다.사가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포악하고 음란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창업주 이연마저 무능하고 줏대 없는 황제로 묘사해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치를 도덕과 완전히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으나 그 간격은 매우 크다. 통상 정치 사안을 도덕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되는 이유다. 당태종 이세민이 성세를 구현해 후대인들로부터 이른바 정관지치를 이룬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무문의 변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부자 형제의 인정과 의리를 저버리는 ‘패륜’의 길을 택했다. 대업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난세를 평정할 때는 동기보다 결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사세가 그리 만드는 것이다. 최고의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게 만든 정관지치와 패륜을 자행한 현무문의 변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정치와 도덕의 상호관계를 웅변한다.
이세민은 비록 현무문의 변 등으로 인해 후대인에게 지탄을 받았으나 그 인물됨은 실로 매우 출중했다. 한고조 유방과 위무제 조조의 기량을 한 몸에 갖추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수나라의 패망을 거울로 삼았다. 나아가 현무문의 변에 따른 비난을 만회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정사에 매진했다. 그가 입버릇처럼 “천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만인의 것이다”라고 역설했던 이유다.
그의 치세 때 각종 제도가 정비되고, 문화가 최고조에 달한 것도 그의 겸허한 자세와 헌신적인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10년의 노력을 들여 마련한 당률은 이후 1,000여 년 동안 동양의 통치체제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었다. 그는 역대 제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 실력을 지녔다. 직접 서법에 관한 책을 짓기도 했다. 음악과 무용 부문에서도 한족과 북방민족의 예술이 융합한 새로운 예술이 등장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세민의 무공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아침)
이위공 이정
《당리문대》는 당태종이, 뛰어난 병법을 발휘한 위국공 이정과 함께 만들어냈던 작품이다. 이정은 경조의 삼원 사람이다. 수양제 대업 말년에 마읍군의 승이 되었다. 부군수에 해당한다. 마침 당고조 이연이 태원유수로 있었다. 이정은 이연을 보고는 천하 경영에 뜻을 둔 것을 알았다. 이에 모반할 것을 알고 강도에 알리려고 장안까지 이르렀다가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하고 중지했다. 당고조 이연이 경성을 굴복시키고 이정을 잡아 죽이려 하자 이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공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난폭함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큰일을 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장사를 죽이려는 것입니까?”
이세민이 이정을 구제하는 데 가세했다. 이연이 그를 놓아주었다. 무덕 연중에 소선과 보공석을 평정한 공로로 양주대도독부장사를 맡게 되어 자리를 옮겼다. 이세민은 보위를 잇자마자 곧바로 그를 불러서 형부상서를 제수했다. 정관 2년에는 검교중서령으로 삼았다. 이듬해인 정관 3년에는 병부상서로 자리를 옮겨 대주행군총관을 겸직했다. 이때 심복의 우환에 해당하는 돌궐을 쳐부수고 정양성을 격파하는 대공을 세웠다. 돌궐의 모든 부락이 다 적북으로 달아났다. 승세를 몰아 북진한 끝에 수나라 제왕 양간의 아들 양도정과 수양제의 황후로 있던 소후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다. 돌리칸이 와서 항복하고 힐리칸이 겨우 단신으로 도망갔다.
당초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고 이세민이 제위에 오른 초기까지만 해도 돌궐의 위세가 당나라를 압도했다. 당나라는 돌궐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정은 돌궐정벌의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세민은 이정을 이같이 극찬했다.
“옛날 전한 때 이릉이 보졸 5,000명을 거느리고 가 흉노에게 항복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름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경은 3,000명의 기병으로 깊숙이 오랑캐의 조정까지 들어가 정양성을 회복하고 북적을 떨게 했다. 실로 고금에 비할 바 없는 대공을 세웠다고 할 만하다.”
후에 이정은 힐리칸을 멸망시킵니다. 그래서 그의 직위는 위정공에서 이위공으로 변하게 됩니다.
당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장수는 울지경덕이다. 울지경덕은 선봉장 유형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이에 반해 이정은 이세민을 대리해 일군을 거느리는 지장으로 활약했다. 이세민은 능력이 출중했던 까닭에 본인이 직접 지휘해 대공을 세웠다. 이정처럼 독자적으로 군사를 이끌며 공을 세운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정은 사후에 당태종의 소릉에 배장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전한 위청과 곽거병의 고사에 의거하여 돌궐 땅 안에 있는 연연산과 토곡혼 안에 있는 적석산 두 곳에 동상을 세워 그의 공적을 표시했다.이정을 당나라 최고의 명장으로 대우했던 결과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정의 사적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아침)
당리문대의 특징
《당리문대》의 편제는 권 상, 권 중, 권 하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편의상의 구분에 따른 것으로 내용을 기준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글자는 1만여 자다. 병서로서는 두꺼운 편이다. 《당리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병서에 나온 모든 병법이론을 정밀하게 분석한 데 있다. 이는 《당리문대》만이 지니고 있는 독보적인 자랑거리다. 모든 병법이론을 인사문제로 집약한 것 또한 다른 병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리문대》만의 중요한 특징이다. 《당리문대》의 사상적 특징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리병중(事理幷重)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병법이론을 동시에 중시했다는 뜻이다. 무경칠서에 편제된 7종의 병서 가운데 《당리문대》를 제외한 나머지 6종을 살펴보면 《당리문대》의 특징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로부터 《손자병법》은 내용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이론상으로도 매우 체계적이어서 병서의 으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오자병법》은 병법이론 등이 상대적으로 단순하기는 하나 현실에 기초한 전쟁론과 군사운용 등을 설파하고 있는 점에서 《손자병법》의 전술이론을 보완하고 있다.
《사마법》은 춘추시대 중엽 이전의 군사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울료자》는 법가사상을 토대로 한 병법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점에서 전국시대의 군사사상을 대표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육도》는 선진(先秦)시대의 병법이론을 종합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삼략》은 도가사상에 기초해 정치군사의 일원화를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당리문대》를 제외한 6종의 병서가 각기 독특한 군사사상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하나의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로 사사언리(舍事言理)다. 구체적인 전례에 대한 분석을 버리고, 병법이론 자체에 방점을 찍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서양의 병학은 동양의 병서와는 정반대되는 사리언사(舍理言事)의 모습을 띠고 있다.
구체적인 전례에 지나치게 주목하면 이론적인 접근이 상대적으로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사상적 세례를 줄 수 있는 제자백가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동양은 제자백가의 사상을 흡입해 병가사상 및 병법이론을 정치하게 다듬기는 했으나 반면에 구체적인 전례에 대한 분석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리문대》는 유독 구체적인 전례를 토대로 병법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를 사리병중이라 한다. 21세기 병학의 관점에서 볼 때 《당리문대》의 사리병중 입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리문대》는 사리언사와 사사언리의 장점을 모두 살려 사리병중의 입장을 취했다. 나머지 6종의 병서에 나오고 있는 모든 병법이론을 총동원해 구체적인 전례의 의미와 문제점 등을 논파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권 상’의 첫 대목에서 당시 최대의 관심사항이었던 ‘고구려공략’에 관한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둘째, 기정병용이다. 이는 모든 병서가 하나같이 강조한 병법이론이다. 《당리문대》는 이를 가장 체계적으로 이론화 해놓았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만큼 폭이 넓고 깊이가 있다. 이론을 한 단계 더 진화시킨 셈이다.
《손자병법》을 제외한 기존의 병서는 기정병용의 핵심인 허실의 문제를 두고 이른바 피실격허(避實擊虛) 차원에서만 접근했을 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당리문대》는 피실격허 차원을 뛰어넘어 ‘허중실(虛中實), 실중허(實中虛)’의 차원으로 나아갔다. 허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손자병법》 〈병세〉에서 역설하는 기정지변(奇正之變)과 기정상생(奇正相生)의 논리와 합치한다. ‘권 상’에 이에 관한 이정의 언급이 나온다.
“용병에 능한 자는 정병의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없고, 기병의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없습니다. 적으로 하여금 그 변화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병을 사용해도 승리하고, 기병을 사용해도 이깁니다. 3군의 병사들은 오직 승리할 줄만 알고, 승리하는 방법 등은 알지 못합니다. 변화무쌍한 용병의 도에 능하지 않고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병력의 분합이 이루어내는 변화는 오직 손무만이 능했습니다. 오기를 비롯한 여타 병가들은 결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셋째, 주객병존(主客幷存)이다. ‘주객’은 공수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주객병존은 공격 속에 수비가 있고, 수비 속에 공격이 담겨 있다는 의미다. 외양상의 수비가 사실은 공격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른바 이수위공(以守爲攻)과 외양상의 공격이 사실은 수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공위수(以攻爲守)의 묘리가 바로 주객병존이다. 주객을 획일적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손자병법》을 제외한 여타 병서에서는 찾을 길이 없는 《당리문대》만의 자랑이기도 하다. 이에 해당하는 대목이 ‘권 하’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하루는 당태종이 이정에게 물었다.
“공격과 방어는 사실 하나가 아니겠소? 실제로 《손자병법》은 ‘공격을 잘하는 자는 적이 어디를 방어해야 좋을지 모르게 만들고, 수비를 잘하는 자는 적이 어디를 공격해야 좋을지 모르게 만든다’고 했소. 그러나 여기서는 적이 와서 아군을 공격하면 아군도 공격하고, 아군이 방어하면 적도 방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소. 공격력과 방어력이 서로 엇비슷할 때 어떤 전술로 임해야 하오?”
이정이 대답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과연 그처럼 서로 공격하고, 서로 수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손자병법》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모두 입을 모아 말하기를, ‘방어를 하는 것은 아직 내가 적을 이길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공격을 하는 것은 내가 적을 이길 힘이 남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문장 자체로 보면 채우지 못했다는 뜻의 ‘부족’은 결국 약하다는 의미고, 남아돈다는 뜻의 ‘유여’는 결국 강하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공수의 기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은 바로 앞 구절에서 말하기를, ‘승리의 가능성이 없을 때는 공격을 삼간 채 수비에 치중해야 하고, 가능성이 있을 때는 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적과 싸워 승리할 가능성이 없을 때 잠시 방어에 치중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마침내 그런 기회가 왔을 때 결단해 공격하라는 취지입니다. 결코 양측의 강약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후대인들은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채 공격에 나서야 할 때 방어하고, 방어에 치중해야 할 때 공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격과 방어는 그 취지가 다른 만큼 결코 하나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공격과 수비의 개념을 하나로 녹여 이공위수(以攻爲守) 내지 이수위공 (以守爲攻)으로 표현한 것은 병법이론의 정수를 통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당리문대》는 공수일여(攻守一如), 기정일여(奇正一如), 사리일여(事理一如)의 관점에서 기존의 병서에 나온 모든 병법이론을 하나로 꿰고 있다.
《당리문대》는 구성이 문답식으로 되어 있어, 체계적이기는 하나 추상적인 용어로 꾸민 《손자병법》보다 이해하기 쉽다. 중국은 오랜 세월 수많은 전쟁을 겪은 까닭에 전략전술에 관한 노하우가 많다. 역대 병서의 병법을 구체적인 전례에 적용한 《당리문대》를 보면 전략전술의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리문대의 특징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