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 세계 최초의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 칠레의 아옌데
칠레의 역사
칠레의 북부는 1520년 마젤란에 의해 발견되기 전 16세기 초까지 잉카제국의 영토였으나 1540년 에스파냐의 P.발디비아 장군이 아라우칸족 정복전쟁을 시작한 이후 27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1810년 9월 18일(칠레의 독립기념일) 전 페루 부왕의 아들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를 최고 총독으로 삼아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이후 100년 간은 영국의 경제지배를 받았다.
1879년 초석(硝石)개발로 유발된 볼리비아·페루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 (1879∼1883)에서 승리함으로써 초석의 대산지 안토파가스타 지역 및 볼리비아 일부를 획득하여 경제적으로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맞았다. 이어서 1886년에는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광산의 국유화를 비롯한 경제자립정책을 추구하였으나 1891년 실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구리산업을 중심으로 미국자본이 진출한 데다 세계공황에 기인한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1937년 공산·사회·급진 정당들의 지지를 받은 P.아기레 세르다의 ‘인민전선’ 정부가 발족하였다.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지지를 받은 곤살레스 비델라 정부(1946∼1952)가 출현하여 크게 좌경화하는 듯하였으나 실제로는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급진사회당 불법화 정책을 폈다.
그후 독재자 카를로스 이바녜스 정권(1952∼1958), 기업인 알레산드리 정권(1958∼1964), 중도좌파의 프레이 정권(1964∼1970)을 거쳐 1970년에 급진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의 무질서한 국유화는 생산의 저하를 초래하였고, 또한 미국계 구리 광산의 무보상 국유화에 대한 미국의 보복적인 구리시장 조작으로 파산 상태에 빠져 사회가 극도로 불안해졌다.
1973년 9월 11일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대통령은 피살되고 1974년 6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독재정부가 수립된 후 16년 간 군정이 실시되었다. 1978년 신헌법을 제정하였으며, 1988년 군사정권 연장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지지획득에 실패해 1989년 12월에 대통령 및 상하원 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1990년에 민주선거를 통한 민정이양이 실시되었다.
기독교 민주당(DC) 및 사회당(PS) 등으로 구성된 중도좌파연립 (Concertacion)정부는 아일윈(Patricio Aylwin, 1990~1994), 프레이 (Eduardo Frei, 1994~2000), 라고스 (RicardoLagos, 2001~2006), 바첼렛 (Michelle Bachelet, 2006~) 대통령 등 1990년 피노체트 군정종식 이후 4번째 연속 집권에 성공하여 20년 간의 집권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칠레의 역사 (두산백과)
칠레의 전두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Augusto Pinochet)
칠레의 군부 독재자(1915-2006). 피노체트는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 17년간 칠레를 통치하며 반정부 시위대와 정적 등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1915년 칠레 발파라이조에서 태어난 피노체트는 18세에 군사학교에서 지정학을 전공했으며, 21살 때 중위로 진급한 후 칠레육사에서 군사 지리학과 정치학을 강의했다.
1973년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의해 군 총사령관에 임명됐으나, 한달만인 9월 11일 군부 쿠데타를 감행, 칠레 최초의 민주정부인 급진사회주의 성향의 아옌데 대통령을 몰아내고 권좌에 올랐다. 이후 17년간 철권통치를 행하며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자행해 비판을 받았다.
피노체트는 집권 초기만 해도 사회주의 정권 이후의 혼란을 안정시키는 한편 시장경제 개혁을 통한 경제 부흥을 달성해 국민의 지지도 얻었다. 그러나 정국 안정 후 물러나겠다던 공약과는 달리 권력기반을 확보한 후 의회를 해산하고 좌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하며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군정 하수인들로 구성된 '죽음의 특공대'를 결성, 집권 직후인 1973년 10월 초 이들을 칠레군 헬기에 탑승시켜 저항이 극심했던 도시를 돌며 75명의 정치범을 살해하기도 했다.
또 집권기간 중 경제건설과 공산주의로부터의 보호라는 미명하에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서 최소 3197명을 살해했다. 아울러 2,0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수십만 명이 체포ㆍ고문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1988년 피노체트의 집권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압도적으로 부결되면서 1989년 12월 19년 만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 결과 파트리시오 아일윈 후보가 당선되면서 피노체트의 정권은 막을 내렸다. 피노체트는 1990년 3월 퇴진했고, 칠레는 16년 만에 민정에 복귀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Augusto Pinochet]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보는 두 가지 시각
오늘날 아옌데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략 두 가지다. 한편에서는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합법적인 사회주의 정권이 국내외 반대 세력의 음모에 희생된 것이라며, 가만 내버려 두었다면 칠레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 한편에서는 선거를 통한 집권 자체가 우연일 뿐이었으며, 이후 정치 및 경제에서 갖가지 문제가 터지며 사회주의 정권의 무능을 드러냈고, 따라서 군부 쿠데타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단언한다. 물론 저마다 일리는 있는 주장이지만,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선 긍정적인 부분으로는, 아옌데 정권이 어디까지나 민주적인 법질서의 한계 하에서 존재했던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대내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민주적인 절차를 지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는 점은 특별한 정책의 성과를 논하기에 앞서서 아옌데 정권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칠레식 사회주의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개혁도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점진적인 개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외국 자본을 규제하는 등의 개혁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좌파 정권에 대한 우파 세력의 맹공과 국민의 지나친 불신 등이 부작용을 빚어낸 점이 크다.
부정적인 부분으로는, 무엇보다도 아옌데 정권이 품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나도 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록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하긴 했지만, 단일 정당이 아니라 좌파 6개 정당이 만든 인민연합(UP)이 거둔 36.2%의 지지율이란 아주 대단한 성과까지는 아니었다. 아옌데의 확고한 지지층 비율은 이보다 더 적었을 것이며, 좌파 6개 정당이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되는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발휘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애초부터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아옌데 본인이 이런 좌파의 분열 양상을 극복하고 반대 세력에 맞설 만한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경제 안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아옌데 정권 3년 동안 칠레 경제는 전반적으로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이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시위와 파업 등으로 사회 불안이 지속되었다. 경제 분야의 대표적인 실책으로는 주요 기업과 은행 등에 대한 무리한 국유화 조치가 손꼽힌다.
특히 외국 기업의 국유화는 결국 미국 등의 경제 제재와 정치 간섭을 불러온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아옌데 정부는 경제 문제조차도 정치 논리로 해결할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을 품었는지 몰라도, 실제로는 경제 문제에서 시작된 갖가지 불만이 결국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는 아옌데 정권의 몰락에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1959년에 쿠바의 공산화로 충격을 받은 미국은 이후 남아메리카 각국의 정치 동향을 주시해 왔다. 미국은 1970년 대선에서도 CIA를 통해 일련의 반(反)아옌데 공작을 실시했고, 아옌데 정권 수립 후에는 칠레에 원조를 중단하고 군부와 접촉하는 등 쿠데타를 직간접적으로 조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미국의 비열한 행위로 인해 이미 악화일로를 걷던 칠레의 경제가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옌데 정권이 미국을 과소평가하고 지나치게 자극한 측면도 없지 않다. 아예 쿠바처럼 미국과 ‘맞짱’을 뜨려는 의지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가뜩이나 지지기반이 취약한 아옌데 정권으로서는 최대한 신중한 행보가 필요했으리라.
여전히 진행 중인 칠레식 사회주의 정권의 실험
역사에서 가정법이란 무의미한 몽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자꾸 가정법을 도입해 보려는 까닭은 그만큼 과거사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군부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미국이 경제 제재를 하지 않았다면, 국민이 아옌데 정권을 좀 더 신뢰해 주었다면, 이후 칠레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조심스럽게 말해 보자면,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아옌데 정권의 미래가 마냥 밝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옌데 정권의 출범 자체가 매우 아슬아슬했음에 비해, 현실의 벽은 쉽게 뛰어넘기 어려울 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아옌데 정권은 이른바 칠레식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셈이다.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피노체트의 독재 치하에서 칠레는 역설적으로 경제 성장을 누렸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칠레에서는 아옌데 정권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한다. 어쩌면 그 당시의 사회주의 실험이 외부의 시각에서는 대단한 의의를 지녔는지 몰라도, 막상 그로 인한 부작용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칠레 국민들의 입장은 항상 매사에 긍정적일 수만은 없었던 까닭이었을까?
아옌데 사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자본주의의 한계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전 세계가 몸살을 앓으면서, 과거의 사회주의 실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90년에 민간 정부가 들어선 칠레에서는 2000년에 사회당의 리카르도 라고스 에스코바르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아옌데 이후 무려 30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사회주의 정권이 출현했고, 현재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사회당의 미첼 바첼렛이 집권 중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펌
사회주의라는 이상 그리고 현실이라는 벽
아옌데 정권은 1970년에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능력의 한계와 미국의 외압으로 좌절을 하게 됩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독재를 했기에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원하는 사회주의 그렇지만 경제가 안정이 되지 않으면 평등과 공평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조금 참으면 된다고 인내를 요구하지만 사람들에게 인내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하루 하루를 견디기 힘든 최하계층에게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사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아주 많은 시간들이 항상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조금만 같이 견뎌주면 해낼 수 있다고 부탁을 하지만 민초들은 매정하게 그럴 수 없다고 부탁을 거절하며 독재자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의탁합니다.
밥을 주지만 자유를 빼았은 독재자와 오랜 시간 싸워야 하며 희생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찾은 자유 앞에서 당황합니다.
한국도 4.19로 얻은 기회를 박정희 쿠테타에게 선물 하고 6월 항쟁도 노태우에게 선물했습니다. 이제 박근혜에 무능으로 온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경제는 어렵고 사드라는 요물을 미국과 중국사이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본과의 오욕된 역사.
역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고 혁명이나 개혁이라는 것도 급진적보다는 시간의 지혜와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급하면 체하고 너무 천천히면 힘이 빠지고.
태평양을 건너면 북쪽으로는 미국을 만나고 남쪽에서는 칠레를 만나게 됩니다. 미국이라는 친구이며 지배자, 우리와 비슷한 경험과 어려움을 겪는 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