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해서: 창조가 짬뽕에서 시작했다고 (선불교)
격의불교
불교의 중국 전래 초기인 위진시대에 나타났던 불교 교리 이해 방법 또는 불교 연구방법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사상이나 교리를 노장사상이나 유교사상 등의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불교 경전인 《반야경》에 나오는 "공(空)"에 대해 노장사상의 "무"(無)개념을 적용하여 그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격의불교로는 불교에 대한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동진(317-420) 시대의 고승이었던 도안(312-385) 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는데, 쿠마라지바 중국식 번역 구마라습 (344-413) 이 불교 경전을 본래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한 이후에야 비로소 극복되었다.
위진시대에는 노장사상에 관한 학문이 성행하여 청담(淸淡)이 유행하였고 특히 노장사상과 유사한 표현 형식을 갖는 《반야경》과 《유마경》이 애독되었다. 그리고 이 경전들을 노장사상과 유교의 역(易)의 사상과 대비하여 연구 토론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그 결과 불교의 공(空)의 의의에 관하여는 본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여러 가지 중국적 해석이 다투어 생겨났다. 이른바 이와 같은 철학적 격의를 특히 현학이라 부른다.
격의불교의 극복
동진(317-420) 시대의 고승으로 초기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인 도안(312-385)은 격의불교의 오류를 깨닫고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는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도안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격의불교의 오류를 반성하고 《반야경》의 여러 다른 번역본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참다운 뜻에 이르도록 노력하였다. 하지만 도안도 격의불교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반야경》 등의 본의가 잘못됨이 없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구마라습이 장안에 들어와 공관불교의 경전들을 올바르게 번역하고 그 교리를 소개한 이후부터였다. 하지만 철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 이후로도 중국의 불교사상은 근본적으로 격의불교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쿠마라지바의 오류
쿠마라지바는 쿠차왕국 시대 살았던 서역 제1의 명승이요 푸른 눈의 승려입니다. '극락'과 '지옥'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석가모니가 아닌 쿠마라지바입니다.
원래 불교 경전인 산스크리트어 불경에는 극락과 지옥이 없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닌 극락과 지옥을 고승 쿠마라지바가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만들었다는 것이며 어쩔 수 없었던 쿠마라지바의 오류라고 부릅니다.
서역 최고의 승려인 쿠마라지바는 승려지만 승려가 아닌 파께승이 됩니다.지경이 되였습니다. 오랫 동안 중국에서 17년동안 연금생활을 했고 후진의 왕제에 의해 불경번역을 명령받습니다. 80살에 죽음을 맞이 할때까지 30년동안 300권의 불경을 번역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금강경, 법화경, 아미타경, 화엄경 등등이 쿠마라지바의 번역입니다. 1400년전에 번역된 법경을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중국인도 인도인도 아니고 승려도 아닌 파계승이 산스크리트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게 됩니다. 수행정진을 멈춘 최고절정 쿠마라지바에게 있어 생의 나머지 사명은 경전 번역, 기존 경전의 오류 수정, 후학용 교본 출간이었습니다.
번역의 어려움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고 합니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남이 씹은 밥을 받아서 내입으로 씹어 다른이에게 먹게하는 과정과 같은 경전 번역의 고충과 난해함 그리고 깨달음
잘못하면 구역질나고 잘못하면 내가 삼켜버리고 잘못하면 상한 독을 첨가하는 것이다.’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는 번뇌 안에서
자신의 종교도 지키지 못하고 파계한 승려는 300권의 불경을 번역합니다. 알파벳같은 산스크리트를 표음문자인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쿠마라지바는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극락, 지옥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인 번뇌시도장. 어떤 사람은 원본에는 없는 극락과 지옥을 만든 것을 쿠마라지바의 오류라고 말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원본을 설명할 방법을 찾다가 극락과 지옥을 만들었을 겁니다.
번뇌시도장: 번뇌 안에 깨달음이 있다.
자신의 삶이 담겨져 있는 귀절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 많은 번뇌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 번뇌 안에 깨달음이 있고 번뇌 자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쿠마라지바의 사상은 동북아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번역을 우리는 오늘도 읽고 있지만 그의 고향인 쿠차는 이슬람을 믿고 있습니다.
번역은 최고의 창조이다
쿠마라지바는 인도인이 아니였지만 간다라에 유학을 하고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를 배웠고 인도의 문화도 같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중국인이 아니였지만 17년동안의 중국생활로 중국의 문화도 배웠습니다.
쿠마라지바는 적어도 3개국어를 했을겁니다. 산스크리트, 쿠차의 언어 그리고 한문.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인 간다라, 중국의 서역 출신 그리고 과거 중국의 수도인 장안까지 거치며 많은 경험및 문물을 익혔습니다.
쿠마라지바가 처음으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분은 아니지만 그분의 번역을 최고로 치는 이유가 있을겁니다. 글자를 한자 한자 옮긴 것이 아니고 뜻을 옮기려고 했을겁니다.
시작이 다르니
개인적으로 공과 무의 관념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노장사상과 유학은현세만을 인정하고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현세에서 최선을 다하는 학문과 현실만을 인정하는 중국사상에 윤회를 인정하고 내세를 믿는 불교는 관념이 같다고 해도 결과는 전혀 다를 겁니다.
삶은 유한합니다. 그래서 귀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삶이 무한하다면 긴장감도 부족하고 감사함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할 때 우리의 감사함도 더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는 선불교가 탄생합니다. 제6대인 혜능에 이르러 선불교는 세력을 확대합니다. 윤회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중국식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중생이 부처이고 부처가 중생이고
참 부처를 보는 해탈의 노래(見眞佛 解脫頌)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오, 깨치면 중생이 부처라. 어리석으면 부처가 중생이오,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오,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진여의 깨끗한 성품이 참 부처요, 삿된견해의 삼독은 참 마군이니라...."
힌두교사상에서 시작한 불교가 중국의 노장사상과 짬뽕이 되며 선불교가 창조됩니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새로운 학문과 경험을 쌓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부처를 찾아내는 겁니다. 자신의 부처 즉 자기 부처가 참 부처입니다. 멀리 밖에 있는 부처가 참부처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부처가 참부처입니다.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나만의 부처, 나만의 예수, 나만의 스토리, 나만의 그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