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제가백가
역사학자들의 통계에 따르면 인류가 문자를 사용한 이후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5,000여 년 동안 기록으로 남아 있는 전쟁 횟수를 모두 합하면 총 1만 4,531회에 이른다고 한다. 한 해 평균 2.6회의 전쟁이 벌어졌던 셈이다. 중국은 춘추시대에 1,211회, 전국시대에 468회의 전쟁이 빚어졌다. 주나라가 낙양으로 천도하는 기원전 770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매년 평균 3회의 전쟁이 터진 꼴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춘추전국시대는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난세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난세 중에 난세’였다. 한 순간에 생과 사가 엇갈리는 난세에는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이 난세 상황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실제로 전국시대 말기 열국의 군주들은 덕치에 기초한 맹자의 왕도 주장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당시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천하통일을 무력으로 실현하는 패도를 차선책으로 제시해 크게 호응을 얻었다. 그의 문하에서 강력한 법치를 주장한 한비와 이사 등의 걸출한 법가가 일거에 배출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법가사상의 요체는 부국강병에 있다. 병가와 법가사상이 일란성 쌍생아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유다.
전국시대 말기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는 사상 최초로 《도덕경》에 주석을 가했다. 《한비자》의 〈해로)〉와 〈유로〉가 그것이다. 법가사상은 노자의 무위지치(無爲之治)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기본 취지를 보면 서로 일치하고 있다. 공평무사를 대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무위지치는 천지만물의 운행이치인 무위의 도를 치국평천하의 원리에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이른바 도치(道治)에 해당한다. 한비자의 법치는 사사로움이 전혀 없는 무사법치(無私法治)를 가장 이상적인 통치로 간주한 점에서 노자의 도치와 취지를 같이한다. (법이 도)
《도덕경》 제79장은 도치의 요체를 사사로움이 없는 천도무친으로 표현해놓았다. 유가도 최상의 이상적인 통치를 공평무사에서 찾은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서경》 〈채명지중〉의 황천무친이 그 증거다. 표현만 다를 뿐 기본 취지는 같다. 사마천도 《사기》 〈화식열전〉에서 도치를 최상의 통치로 칭송했다. 해당 대목이다.
최상의 통치는 백성을 천지자연의 도에 부합하도록 이끄는 도민(道民)이다.
그 다음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식으로 이끄는 이민(利民),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식으로 이끄는 교민(敎民),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식으로 이끄는 제민(齊民)이다.
최하의 통치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식으로 이끄는 쟁민(爭民)이다.”
도민은 도가, 이민은 상가(商家), 교민은 유가, 제민은 법가와 병가의 통치이념을 요약해놓은 것이다. 여기의 상가는 관중(管仲)을 효시로 한 제자백가를 말한다.
상가의 사상적 배경을 처음으로 설명한 것이 《관자》 〈경중〉이다. '경중’은 재화와 화폐 등을 관장하는 부서를 뜻한다. 일찍이 주나라는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태부를 비롯해 관할영역에 따라 옥부와 내부, 외부, 천부, 천부, 직내, 직금, 직폐 등의 9개 부처를 설치했다. 관중은 이 9개 부처를 중상정책의 산실로 파악하면서 경중을 재화로 풀이했던 것이다. 〈화식열전〉의 경중구부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 〈관안열전〉 역시 관중의 부국강병 정책을 설명하면서 《관자》의 경중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마천이 〈화식열전〉에서 중상을 역설했던 것은 《관자》의 가르침에 크게 공명한 결과다. 21세기에 들어와 중국 학계는 관중에서 시작해 자공을 거쳐 사마천에 의해 집대성된 부민부국의 사상적 흐름을 ‘상가’로 요약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중가로 부르고 있다. 소진과 장의 등의 유세가를 두고 합종책과 연횡책을 구사하며 천하를 종횡으로 누빈 점에 주목해 종횡가로 명명한 것과 같은 취지다. 일종의 외교학파에 속한다. 그러나 경제학파에 해당하는 관중은 부국강병의 관건을 중상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경중가보다는 상가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제자백가의 구성원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사마천이 〈화식열전〉에서 통치의 수준을 도가의 도민, 상가의 이민, 유가의 교민, 법가의 제민 순으로 늘어놓은 것은 결코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게 아니다. 《관자》의 부민부국 이론을 충실히 좇은 결과다. 사마천의 〈화식열전〉 편제는 한비자가 역대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를 저술한 것에 비유할 만하다.
사마천이 거만의 재산을 모은 공자의 수제자 자공을 두고 공부하며 치부한 이른바 유상(儒商)의 효시로 칭송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중은 《관자》 〈치국〉에서 ‘부민’의 중요성을 이같이 설명해놓았다.
“무릇 치국평천하의 길은 반드시 우선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서 시작한다. 백성이 부유하면 다스리는 것이 쉽고, 백성이 가난하면 다스리는 것이 어렵다.”
관자사상을 관통하는 최고의 이념이 여기에 있다. 필선부민(必先富民)으로 표현된 ‘부민’이 바로 그것이다. 법가와 도가, 유가, 상가 등이 무사무편(無私無偏)한 통치를 최상의 통치로 간주한 것은 이른바 애인애민 이념을 국가공동체의 존재이유로 파악했던 결과다. 제자백가가 치국평천하 방략을 놓고 치열한 사상논쟁을 전개한 백가쟁명은 애인애민의 방법론을 둘러싼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제자백가의 애인애민 방략을 둘러싼 논쟁은 21세기의 사회과학 용어로 풀이할 때 국가공동체의 존재이유 및 통치권력 발동의 정당성에 관한 논쟁에 해당한다. 학자들은 통상 이를 왕패지변이라 한다. 당시 논쟁을 주도적으로 이끈 당사자는 왕도를 주장한 유가와 패도를 역설한 법가였다.
전국시대 말기에 공자사상을 집대성한 순자는 유가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법가사상을 적극 수용했다는 점에서 맹자와 구별된다. 그가 왕패지변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했던 배경이다. 《순자》 〈왕제〉의 해당 대목이다.
예로써 다스리는 자는 왕자(王者), 바른 정사를 행사는 자는 패자(霸者), 민심을 얻는 자는 안자(安者), 백성을 착취하는 자는 망자(亡者)가 된다.
왕자는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패자는 선비를 부유하게 만들고,
안자는 대부를 부유하게 만들고,
망자는 군주 개인의 창고를 부유하게 만든다.
안자는 일시 욕을 먹을지라도 부국강병을 꾀해 결국 백성의 지지를 받는 자를 말한다. 《순자》는 안자를 다른 대목에서 강자 또는 존자로 표현해놓았다. ‘강’은 강(强)과 같은 뜻이다. 순자는 맹자가 말하는 왕자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제자(帝者)를 상정했다. ‘도치’를 실현하는 자를 말한다. 〈왕제〉의 해당 대목이다.
“왕자는 사람을 얻고자 하고, 패자는 동맹국을 얻고자 하고, 강자는 땅을 얻고자 한다. 사람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제후를 신하로 삼고, 동맹국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제후를 벗으로 삼고, 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제후를 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고, 공격하지 않고도 얻고, 무력동원의 수고를 하지 않고도 천하를 복종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 3가지 이치를 아는 자는 원하는 대로 취할 수 있으니 왕자가 되고 싶으면 왕자, 패자가 되고 싶으면 패자, 강자가 되고 싶으면 강자가 될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상황에 따라 왕자와 패자,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단계의 치도인 제도(帝道)를 언급한 것이다. 제도와 왕도, 패도, 강도(强道)를 모두 인정하는 것을 이른바 ‘치도사분론’이라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새롭게 발견된 상가를 포함시키면 ‘치도오분론’이 된다. 치도논쟁과 관련한 제자백가의 입장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가가 추구하는 소왕(素王)은 《장자》에 처음 등장한 용어로 후대인들은 이 명예로운 칭호를 공자에게 올렸다. 제왕에 버금하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뜻이다. 노자가 말한 제도는 하나의 이념형에 불과한 까닭에 현실적으로 제자가 출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전 세계의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무관의 황제에 해당하는 소제(素帝) 내지 소황(素皇)이 출현했다.
주목할 것은 제자백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세상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도가를 포함해 유가와 묵가는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의 배경에서 출현했지만 난세 자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했다. 조만간 치세가 도래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이는 그만큼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음을 반증한다. 이들이 높은 수준의 덕치를 지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 모두 이런 낙관론을 좇았다. 한무제가 유학을 유일한 관학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선언한 이래 역대 제왕이 하나같이 도덕을 최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던 것이 그렇다. 모든 왕조가 통상적인 평세를 태평성대의 성세로 미화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실제로 당태종 때의 정관지치(貞觀之治), 청조 강희제에서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제외한 여타의 성세는 관학을 장악한 유가가 의도적으로 미화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주(西周) 초기 주성왕과 주강왕 시대의 성강지치(成康之治)를 비롯해 전한 초기 한문제와 한경제 때의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성세로 미화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노자와 공자가 언급한 도덕국가는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상향에 지나지 않는다. 200~300년 단위로 왕조가 바뀌는 상황에서 평세만 유지해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만하다. 평세를 성세로 미화한 것을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위난세(危亂世)마저 치세로 미화하는 경우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선조의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높이고, 그의 치세를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미화했던 것이 그렇다. 목릉은 선조의 능호(陵號)다. 왜란으로 인해 나라가 초토화되고 백성이 어육이 되었는데도 반성하기는커녕 성세로 미화했던 것이다. 300년 뒤 일본에게 패망했던 것도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다.
이런 황당한 일이 빚어지게 된 데에는 천자를 정점으로 한 중화질서가 크게 작용했다. 중화질서를 좇는 한 왜란 및 호란 등과 같은 외침을 제외하고는 중원으로부터 직접적인 침략위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조선조가 한가하게 당쟁이나 벌이며 500년 동안 유지되었던 배경이다. 이는 19세기 중엽 아편전쟁에서 청조가 양이(洋夷)로 낮춰 보았던 대영제국에 참패한 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경십서 1권 해제 - 제자백가와 병가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