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2: 나는 쓸쓸한 긍정주의자
내 안에 숨쉬고 있는 시지프스에게 묻다!
4년 전에 쓴 글인데 다시 읽어보니 내 마음을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골프 치다 허벅지 부상을 당했습니다. 나이 먹으니 별 부상을 다 당합니다. 소염제를 먹고 있는데 미리 정해진 출장이 있어서 토론토에서 4시간 걸리는 디트로이트 옆에 윈저로 차로 오는데 피곤하고 졸리고 교통사고 공사로 8시간이 걸려서 할 일은 하나도 못하고...
하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왜 살지? 블로그에서 찾으니 내가 했던 질문과 답이 있습니다. 4년 전 글인데 지금도 생각은 변한 것이 없네요!
** 시지프스의 신화**
시지프스(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코린토스 왕국에서는 그를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왕 헬렌의 아들, 혹은 후손이었던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의 아들이라 한다. 다른 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라고도 한다. 플레이아데스 메로페의 남편으로서 에피라(코린토스)를 건설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아버지라고도 한다(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아가 라에르테스와 혼인하기 전).
시지프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지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지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지프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오디세이아,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한편 플레이아데스 7자매는 사후에 하늘로 올려져 별자리가 되었는데, 그 중 신과 연애했던 6명은 빛을 발하였으나 인간 시지포스의 아내였던 메로페만이 부끄러워서 빛이 약하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시지프스의 아들인 글라우코스는 벌로 불임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설과 말에게 잡아 먹혔다는 전승도 있다.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는 그가 바위를 굴러 올렸으나 떨어질 줄 알고도 바위를 굴리는 것과 밀어올린 바위가 굴러 떨어졌을 때 다시 바위를 올리려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인간승리라고 평가했다.
1942년 7월,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그의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tranger》(1942)은 발표되자, 칭송과 함께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 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神話)》(1942)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시지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출처]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 네이버 백과사전
쓸쓸한 긍정주의자
동창 중에 한 명은 자주 시지프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합니다. 허털웃음과 함께...인생은 부질없는 짓을 반복하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부조리라고 말합니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 친구는 시지프스에게 직접 물어보았을까? 바위를 반복적으로 올리는 일이 어떤 일인지...
토마스: 힘들지는 않습니까?
시지프스: 힘듭니다. 그런데 이제 이골이 나서 할만합니다
토마스: 바위를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 하는데 멈추고 쉬면 안됩니까?
시지프스: 언젠가는 되겠죠..
토마스: 바위를 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시지프스: 바위를 정상에 올리고 난 후 무슨 일을 할까, 너무 힘들다, 어떻게 하면 쉽게 바위를 올릴 수 없을까...나는 이 일을 왜 할까? 매일 다른 다양한 생각을 합니다.
토마스: 굴러 떨어질 바위를 왜 올리십니까?
시지프스: '사람은 모두 죽는데 왜 지금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와 비슷한 질문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을 즐겁게 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이 일을 싫어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습니다. 즐거워서 좋아서 할 때도 있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할 때도 있습니다. 하다 보면 힘들기도 괴롭기도 즐겁기도 행복하기도 합니다.
힘든 안에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친구가 있으면 도움이 될텐데
시지프스: 그러내요...
남들처럼 알베르 카뮈의 책 '이방인', '페스트'를 읽었습니다.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담겨져 있는 그런 책들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만 그렇지만 무엇인가 허무한 그렇지만 긍정적인..허무한 긍정론자가 알베르 카뮈였나 봅니다. 저는 쓸쓸한 긍정론자라서 그런지 알베르 카뮈가 좋습니다.
매일 매일은 아니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다 보면 생각보다는 그렇게 나쁘지 않고 가끔 즐겁기도 합니다. 표현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알배르 카뮈의 허무한 긍정론과 저의 쓸쓸한 긍정론은...
그리고 시지프스를 도와 줄 친구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나의 친구를 찾겠습니다.
51%와 49%의 차이가 세상을 진화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시지푸스가 51% 만큼 즐겁게 바위를 올렸으면 합니다. 49% 만큼 힘들고..저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