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대해서: 말이라는 언어의 한계 (양날의 칼)
멈추면 알게 되는 것들
말이라는 것이 참 힘듭니다. 나이를 먹어도 하나도 해결되는 것이 없습니다. TV 리모트 콘트롤 같습니다. 사람들은 리모트 콘트론이 안되면 더 세게 누르게 됩니다. 더 세게 누른다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말을 했는데 상대방이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면 리모트 콘트롤 사용법처럼 같이 말을 반복하면서 더 크게 말을 하게 됩니다. 옆에서 듣고 있으면 금새 알겠는데 당사자들만 모릅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어렵고 더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하면 더 문제만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말은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오해만 쌓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로 이해를 하려고 말을 시작했는데 하면 할수록 더 문제만 발생하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을 멈추면 조금은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도 말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경우도 있고 단어의 한계가 있어 정확하게 말을 전달할 수 없다는 답답함도 있습니다. 감정이 고조되면 말은 들리지도 않기도 하고.
공인들이 말실수를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고 변명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더 커지기도 합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변명을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신이 말실수를 하게 된 경위나 배경을 설명하려다가 더 큰 말실수를 하게 됩니다.
말이라는 것이 말하는 사람의 것인 것 같지만 말하기 전까지는 말하는 사람 것이고 입에서 나오는 순간부터는 듣는 사람 것이 됩니다. 말한 사람의 뜻보다는 듣는 사람의 이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정성의 중요성
친한 친구가 동우회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어 야유회에 몇 명에게 수박을 큰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함께 가지고 오라고 부탁을 했더니 마음대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수박만 가지고 온 사람들, 수박과 빈 아이스박스를 가지고 온 사람, 부탁을 다 들어준 사람 등 세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뭐가 문제였을까요? 친구가 잘 전하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건성으로 들었을까요?
나이가 60살 근처들인데 경험상 수박을 가지고 오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고 야유회를 한 두 번 간 것이 아니기에 아이스박스에 얼음이 왜 필요한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성의 부족일 것 같고, 자신들은 총무가 아니니까 자신들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냥 귀찮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해를 못했으면 다시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럴 정성은 없었을 겁니다.
친구가 조금 황당해서 싫은 소리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친한 만큼 성의를 보였다고 합니다.
친한 관계면 성의를 다해서 수박을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쟁여서 왔고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성의표시만 했고...친구가 말을 정확하게 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 아니고 그냥 우리 주위에서 매일 발생하는 일입니다.
회사에서도 상사가 무슨 지시를 하면 어떻게 행동하나요?
알면서도 모른 척도 하고, 기분 나쁘면 깡 무시도 합니다. 상사를 좋아하거나 무서우면 상사의 지시보다 더 잘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진짜 필요하면 추가 질문을 하면 됩니다.
이심전심
말을 제일 잘 전달하는 방법은 이심전심입니다. 잘 살펴서 알아서 이해하면 됩니다.
말은 시작 하는 순간부터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서로 말하고 하는 토픽에 대한 이해력이 비슷한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공유하는지, 서로 신뢰에 대한 한계도 존재 할 수 있고 그리고 감정의 앙금은 남아 있지 않는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말의 내용보다는 말의 형식인 톤이 더 중요할 때도 많고...목소리가 듣기 싫으면 말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분위기도 중요하고...
그렇지만 마음이 전해지면 미소를 (이심전심을 하면 염화미소) 를 짓게 됩니다.
염화미소 (拈 잡을 념 華 꽃 화 微 적을 미 笑 웃을 소)
어느 날 석가세존께서는 영산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였다. 그때 석가께서는 연꽃을 손에 들고 꽃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그 뜻을 몰라 잠잠히 있었지만, 가섭존자만은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염화미소가 성립 된 것이다.
그리하며 석가께서는 가섭존자를 인정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정법안장 (正法眼藏 인간이 원해 갖추고 있는 마음의 덕),
열반묘심 (涅槃妙心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 (實相無相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 (微妙法門 진리를 깨치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 (不立文字 敎外別傳 언어나 경전에 따르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이심전심은 원래 불가의 말이며 '심오한 이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마음으로 깨닫게 한다' 는 뜻이다. 염화미소는 그 상징이었다.
연꽃은 탁한 연못에서 피어나는데 꽃은 아름답고 깨끗하기 그지없습니다. 즉 부처님은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오히려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는 진리를 나타내셨고,마하가섭은 그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중에서
석가님이 인도북부 지금은 파키스탄 쪽 분이라는데 한문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겠죠?
석가님은 그쪽 사투리인 팔리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라 합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인도의 귀족언어인 산스크리트로 번역한 것을 중국으로 경전을 가지고 와서 한문으로 번역을 다시 하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우리들은 읽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심전심은 뜻입니다. 염화미소는 행동이었고. 석가님은 이심전심이라는 단어는 모를 겁니다.
석가님을 만일에 만난다면 재미있겠네요..."석가님 이심전심 정말 좋습니다" 라고 말하면 염화미소를 지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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