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네로 황제 이후
네로(Nero)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5일~68년 6월 9일, 재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이자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칭하였다.
흔히 네로 황제라고 하면 정신 이상자나 폭군을 연상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문화는융성하였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 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를 대학살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
네로 이후 4명의 황제들
쥴리아스 시저 이래 시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시이저의 양자였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다. 허나 시이저의 전무후무한 영향력으로 볼 때 상징적으로 시이저의 핏줄이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네로 이후 내전 후 황제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핏줄이기는 커녕 로마 명문 귀족 출신도 아닌 지방에서 태어나 말단으로부터 승급하여 군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네로의 자살 후 극도의 혼란에 빠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아닌 힘 있는 군단장이나 속주총독 등이 황제를 자처하고 나섰다. 황제 자리 쟁탈전으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이어지는 황제는 1년 반 동안에 암살, 자살, 사살로 끝을 맺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오르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명한 콜로세움의 건축을 시작한 황제이고 그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콜로세움은 완성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평민에서 로마제국 9대 황제가 되고 그의 두 아들도 황제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고 황제가 되기 전에는 로마에 도전한 예수살렘을 점령하고 모든 유태인들은 예수살렘에서 추방하여 세계2차대전 후까지 유태인들이 2000년 가까이 고향을 떠나 떠돌게 함.
재위 이전
서기 37년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모친은 아우구스투스의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이다.
그의 출생 당시 로마 제국은 외삼촌인 칼리굴라의 집권기였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사망하였다. 서기 49년 모친인 아그리피나가 숙부(네로의 외종조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고,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재위 시기
네로는 서기 54년 양부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세 살 차이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집권 전반기 그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와 근위군단 장교 부루스의 보좌를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로마의 신이 황제에게 로마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을 했다."라는신념에 따라 로마의 문화와 건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55년 의붓동생인 브리타니쿠스를 독살(이는 모친 아그리피나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있다)하였고, 59년에는 정치적으로 간섭해 온 모친 아그리피나를, 62년에는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였다.
서기 64년 기름 창고 사고가 원인이 되어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심이 혼란스러워지자, 당시 로마 제국의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워 기독교도를 대학살함으로써 로마 제국 황제 중최초의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되었다. 65년에는 정치 스승인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여 2대 제전을 창시하였으나, 정치는 문란하여 68년 친위대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죽음
68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가 일으킨 내전이 일어나고 이에 각지의 총독들이 동조하여, 마침내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유대인의 저항 그리고 추방 (요세푸스와 베스파시아누스)
여기서 기이하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그 당시의 로마제국의 상황으로 보건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확률은 눈꼽 만치도 없다. 베스파시아누스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선 요세푸스가 그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을 얘기했을 때의 로마황제는 네로였고 쥴리아스 시저 이래 시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시이저의 양자였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다. 허나 시이저의 전무후무한 영향력으로 볼 때 상징적으로 시이저의 핏줄이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핏줄이기는 커녕 로마 명문 귀족 출신도 아닌 지방에서 태어나 말단으로부터 승급하여 군단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더 나아가 그 때의 네로 황제의 나이는 30세인데 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나이는 54세로서 모르긴 몰라도 네로가 황제직을 다 했을 때에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나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폭정의 네로는 이듬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로마는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 아닌 힘 있는 군단장이나 속주총독 등이 황제를 자처하고 나섰다. 황제 자리 쟁탈전으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로 이어지는 황제는 1년 반 동안에 암살, 자살, 사살로 끝을 맺고 베스파시아누스가 9대 황제로 오르게 된다.(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유명한 콜로세움의 건축을 시작한 황제이고 그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콜로세움은 완성된다.) 그러니까 요세푸스가 황제가 되리라고 예견하고 3년 만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것이 계시이든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도박이든 중요한 것은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다는데 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말을 받아들였든지 아닌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이후 그 덕에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신임을 톡톡히 얻게되고 다음 황제인 티투스 대에 까지 황제들 옆에서 비서격의 역할을 하게 되고 후일 ‘유대전쟁사’를 기술하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 (69년 11월 17일 - 79년 6월 23일)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이다. 그는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는 아시아 속주의 징세청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어머니는 베스파시아 폴라이다. 두 형제의 차남으로 사비니지방의 레아테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로마 황제가 되는 타이스 도미티아누스를 두었고, 또 도미틸라라는 딸을 두었다.
형을 따라 공직에 입문하고, 36년 트라키아 지방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다. 이듬해 회계 감사관으로 선출,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복무한다.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 39년 조영관직을 거친 후이듬해인 40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페렌티움 출신의 기사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황제가 되기전에 죽었는데,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집안의 해방 노예 출신인 카이니스라는 여자를 곁에 두고안주인처럼 대우했다.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가신이었던 해방노예 나르키소스의 천거로 그는 게르마니아에 있는 2 아우구스타 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생애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 집안의 둘째 아들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네로시대에는 뛰어난 장군으로 로마 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임기가 거의끝나갈 무렵 로마 황제의 그리스 별궁에서 네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였다가 네로 황제의시를 들으며 졸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양봉을 하며 소일하게 된다.
2년여의 세월이 지나자 유다 지역에서 유대교 민족주의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를 평정할 지휘관으로서 새로이 임명을 받고 유대땅으로 파견되는데지략과 용맹성으로 유대 북부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다인 지도자를 포로로잡게 된다. 후에 로마로 들어가 시민권을 얻게되는 요셉, 즉 로마인으로서의 요세푸스는 로마와 유다 간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양 쪽의 상생을 모색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다를무리 없이 통치하였다.
물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정치를 도운 요세푸스를 보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마에서는 반란을 피해 자살한 네로의 급서로 말미암아 큰 혼란이 야기되고 이를 수습할적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인에게 선택되면서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내전 상태의 로마를 평정하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시키면서 무능한 군인 출신 세 황제의 뒤를 이어 새로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이며 그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를 이루게 되었다.
공적과 오점, 그리고 일화
초대 원수였던 아우구스투스 이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권한을 베스파시아누스에도 부여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원로원에게 제정하도록 했다. 이로써 베스파시아누스도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여러 황제처럼 통치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정비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종래 원로원에 (관습적으로) 부여되었던 황제탄핵권을 부정하여,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권력 균형이 무너졌다. 이로써 정권 교체는 원칙적으로 황제의 죽음에 의해서만 행해지게 되었고, 후대에까지 황제의 암살이 횡행하는 원인이 되었다.(군인 황제 시대를 포함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의한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황제의 순직율이 약 과반수에 이른다)
네로의 명령에 따라 66년부터 유대항쟁을 지휘했다. 70년 9월에는 아들 티투스가 2년에 걸친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74년 봄에는 플라비우스 시르우가 혁명당원들이 항쟁한 마사다 요새까지 함락시킴으로써 유대항쟁 진압을 끝마칠 수 있었다.
재정의 건전화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은 74년에 유료공중화장실을 설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반대파들의 조소를 받았지만, 그에 대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라는 반론은 돈에는 귀천이 없음을 말해주는 유명한 문구가 되었다(아들 티투스가 이 세금에 대해 "냄새나는 화장실에 세금을 매기다니요"하고 반대했을 때에도, 화장실세로 거둔 금화를 티투스의 코 끝에 들이대며 "이 금화에서 어디, 냄새가 나느냐?"라 물었다고도 한다).
또 현재까지도 유럽의 공중화장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름(정확히는 그의 이름을 각국어로 번역한 단어)으로 불린다.(자주 오해받는 점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설치한 공중화장실이란 사실 볼일을 본 이용자에게 요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중화장실에서 모은 오줌을 가죽가공업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양털의 기름 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의 오줌을 사용했다)
75년에는 콜로세움의 건설을 시작했다. 이때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거중기와 같은 기계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유머 감각이 뛰어났는데, 평소 공화정 부활을 주장하는 견유학파의 철학자들에게 "난 개가 짖는다고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병이 들어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가엾게도 이 몸은 신이 되어가는 중이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말해진다.(당시의 로마 황제는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일어나 있자! 지금부터 나는 신이 될거야!"라 외치고는 선 채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진심으로 신이 된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유머였다.
재정 건전화에 힘쓴 그의 노력은 사후 '인색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의 장례에 들어간 비용(약 1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을 듣고 놀란 베스파시아누스가 관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나한테 10만 세스테르티우스만 줬으면 날 티베르 강가에 버릴 수도 있었는데"(그런 일로 돈 쓸 것 없이 그냥 자신의 사체를 강에 버려도 된다)고 했다는 내용의 희극이 상연된 적이 있다. 다만 황제이자 자신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그러한 내용의 희극에 대해, 당시 황제였던 티투스는 어떤 책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이는 티투스의 자비심을 나타내는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