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중국 통일의 기초를 만들다 (부국강병의 전형 변법)
비슷한 시대인 BC 8세기에서 3세기까지 인도의 소피스트들 육사외도들은 삶에 대한 깨달음에 대해서 고민했고,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방법론을 고민했고, 중국의 제자백가들은 난세를 어떻게 하면 타개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들 중에 인도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하게 되고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중국에서는 공자님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부처님만 대접을 받고 소크라테스와 공자님은 찬밥이었습니다.
이유는 뭐였을까요?
What's in it for me? What have you done it for me lately? - missing
소크라테스와 공자님은 절대주의의 정의와 진리를 이야기했는데 시대가 원하던 것은 부국강병이나 개인의 성공/처세술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절대주의를 이야기하셨지만 상대주의를 존중했습니다. 삶에 대한 깨달음이 바로 개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와 공자님은 조금 부족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지.
소크라테스는 질문으로 사람들의 무지를 알려주었고 공자님은 백성들이 잘살 수 있는 왕도를 전파하려 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좋은데 불편했습니다. 일단 사는 것이 중요한데...
제자백가의 하나인 법가가 유교보다는 당시에는 필요했나 봅니다. 진나라의 상앙은 법가의 변법을 시행해서 중국 통일의 기초를 다집니다.
그렇지만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의 폐단으로 잡히고 자신이 만든 법이 사람들과 나라를 부강하게는 만들었으니 얼마나 구속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로니가 벌어집니다.
상대주의가 잠시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진리를 사람들은 원하나 봅니다.
상앙의 개혁, 진이 강국으로 발전하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진의 효공(재위 전 361~338)을 섬긴 상앙(商鞅)의 변법이 부국 강병책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진은 일약 강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개혁에서는 현(縣)이라는 행정 단위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영(令, 장관)과 승(丞, 부장관)을 파견, 호적을 편성해서 농민의 징병을 쉽게 동원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여 일률적으로 조(租)와 인두세(人頭稅)를 징수하고, 도량형의 단위를 통일하였다. 전쟁에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작위를 내려 포상하고, 법의 위반자에게는 엄벌을 가하였다.
변법의 시행, 법의 가치가 인정받다
상앙은 '변법', 곧 황무지 개간의 필요를 강조하였다. 개간이 진행되면 자작농이 많아지게 된다. 자작농이 많아지게 부양책을 써서 매 가구마다 직접 세금을 징수하고 부역을 부과한다면 국력은 부강해질 것이다.
'부자와 형제가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을 금한다.'
'백성 중 2남 이상이 있는데 분가하지 않는 자는 그 부역을 배로 한다.'
이것이 상앙이 시행한 '변법'에서 제1의 방책이었다. 그는 중농주의를 시행하였다. 다음으로 자립한 호구들을 십오(10호조와 5호조)로 조직하였다. 그리고 악행을 한 것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는 자는 동등한 죄인으로 다루었고, 고발한 자에게는 적의 수급(首級)을 자른 것과 동등한 상을 주었다.
상앙의 '변법'이 공포되고 나서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그 법이 얼마나 시행되는지 보자는 투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상앙은 3장(丈)(약 7m)이나 되는 큰 나무를 서울 남문에 세우고,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긴 자에게는 "10금을 준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모두 의심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50금을 준다"고 선언하였다. 어떤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것을 옮겼더니, 상앙은 즉석에서 50금을 주었다. 또한 태자가 법을 범하였다고 해서 왕자의 스승을 엄벌에 처하였다.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람들도 이제 '법'의 가치를 믿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조심스럽기는 했으나, 법 앞에서 '평등'이 보장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점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시행되기 10년, 진의 국민은 크게 기뻐하였다.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고, 산에 도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앙, 진의 재상으로 권세를 누리다
그 후 진이 서울을 함양으로 옮기게 되면서, 상앙은 훗날 군현제의 기본이 된 제도의 도입과 도량형의 통일 등 제2차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진은 치안이 안정되고, 경제력과 군사력이 막강한 강대국으로 변모하였다.
기원전 340년, 상앙은 위(魏)를 토벌하기 위해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출진하였다. 위의 혜왕과는 상앙이 불우했던 시절에 원한이 있었다. 상앙은 위가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여 그들이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 공격하여 크게 이겼고, 위에게서 넓은 땅을 빼앗았다. 위의 혜왕은 지난날 상앙이 관리로 일하기를 원했을 때 거부하여 그에게 원한을 사게 된 일을 크게 후회하였다.
상앙은 이 공적으로 허난성의 상(商, 고대 은의 도읍지)을 위시한 15개 읍을 하사받아 '상군(商君)'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진의 재상으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스스로 정한 법을 짓밟아 죽음을 맞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과대한 사유지는 소유하지 못한다'고 하는, 상앙이 정한 법을 스스로 짓밟은 결과가 되었다. 조양이라는 사람이 상앙에게 충고하여 말하였다.
"옛날 진의 오고대부 백리해는 힘들어도 수레에 올라타지 않았고, 더위에도 수레의 덮개를 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죽게 되자 진나라 남녀는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하며 노는 일을 삼갔다고 하지 않던가. 그와는 달리 선생은 어떠한가. 집을 나섬에 뒤따르는 수레가 10량이요, 역사(力士)가 수레 곁에서 호위하고 있다. 어서 이번에 받은 15개 읍을 반납하고, 논에다 물을 대는 일이라도 생각하도록 하시게."
그러나 상앙이 그 말을 따를 리 없었다. 한참 세도를 누릴 때 상앙의 뒤를 보아주던 효공이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일찍부터 상앙을 미워하고 있던 진의 귀족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상앙이 모반하였다"고 말하였다. 상앙은 맨몸으로 뛰어나와, 국경 지대인 함곡관(函谷關)의 한 민가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그 집주인은 상앙이 안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며 말하였다.
"상군의 법에 따르면 통행증이 없는 사람을 재우면 공범자가 되는 것을 모르시오? 어서 물러나시오."
상앙은 이를 갈며 탄식하였다.
"법의 폐단이 이 정도에 이르렀던가."
상앙은 이웃 나라인 위로 도주하려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지난날의 원한을 잊을 리 없었다. 그들은 상앙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틈을 보아 도주한 상앙은 자기를 추격해 오는 진의 병사들과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황하 물가에 쓰러졌다. 진의 혜왕은 그 시체를 서울 함양으로 운반하여 '수레로 찢는 형'에 처하였다. 기원전 338년의 일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 - 제자백가의 시대(기원전 550년 ~ 기원전 240년)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