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관중 (필선부민)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라 하여 유명하다. 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 제환공을 도와 춘추5패의 첫번째.
· 평생을 포숙아와 깊은 우정 '관포지교'
· 상가와 병가의 효시 (필선부민을 통한 부국강병 그리고 문화대국으로)
· 저서 '관자'
무릇 치국의 도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이른바 '필선부민'에서 출발해야 한다. 백성이 부유하면 치국치민이 쉽고, 가난하면 어렵게 된다. 치국치민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필선부민'을 행한 뒤 국정에 임한다.
-관자 치국편-
관중이 활약한 춘추시대 중기는 농업의 발전에 힘입어 상공업도 높은 수준에 이르던 시기였다. 법가와 유가가 중농억상(重農抑商)을 역설한 데 반해 관중은 농상병중(農商竝重)을 지지했다. 상업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이 돋보인다. 그를 상가의 효시로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래 관중은 상가와 병가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의 사상적 효시에 해당한다. 그만큼 폭이 넓고 깊다. 《관자》 〈병법(兵法)〉을 병서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병법〉의 다음 구절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용병을 원대하게 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적들로 하여금 마치 공허한 곳에 머물며 그림자와 싸우는 것처럼 만들 수 있고, 적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아군의 자취를 추적하지 못하게 만들면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적이 아군의 형적을 추적하지 못하고 임의로 작전할 수 없게 만들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 이를 일러 병도라 한다. 사라졌으나 있는 것 같고, 뒤에 있으나 앞에 있는 것 같으니 병도의 위엄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손자병법》과 비교할지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관자》에 따르면 군사력의 강약에 의해 국가의 존망과 안위가 결정된다. 《관자》가 군비폐지론에 해당하는 송견(宋銒) 등의 침병지설(寢兵之說)과 묵자의 겸애지설(兼愛之說)을 반대하며 전쟁불가피론에 입각해 군비강화를 역설한 이유다. 고대 성왕들의 전성시대에도 군대가 있었다는 것이 논거다.
주목할 것은 전쟁의 승패가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역설했던 점이다. 나라가 부유해야만 우수한 무기를 확보할 수 있고, 우수한 무기를 확보해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논리 위에 있다. 《관자》 〈치국〉의 다음 대목은 부국강병 논리의 탄생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성이 농사를 지으면 농토가 개간되고, 농토가 개간되면 곡식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유하면 군사가 강해지고, 군사가 강해지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토가 넓어진다.”
부민을 통한 부국강병의 논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속적으로 부국강병을 유지하기 위해 민생의 안정에 힘쓰고 생산을 지속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관자》에 나타난 군사사상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부민부국을 용병 및 전쟁승리의 배경으로 간주했던 탓이다. 《관자》 〈7법(七法)〉의 해당 대목이다.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능히 군사를 강하게 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백성을 능히 다스리면서도 군사운영의 책략에 밝지 못하면 역시 그리할 수 없다. 군사운영에 밝지 못한데도 반드시 적국을 이긴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군사운용에 밝을지라도 적국을 이기는 책략에 밝지 못하면 역시 적국을 이기지 못한다. 군사력으로 반드시 적국을 제압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천하를 바로잡은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군사력으로 반드시 적국을 제압할 수 있을지라도 천하를 바로잡는 명분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역시 그리할 수 없다.”
복잡한 대외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또 다른 형태의 정치수단으로 전쟁을 상정한 결과다. 《관자》가 명분을 중시하며 군대의 출동을 자제하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자병법》의 군사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손자병법》 역시 전쟁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상의 갈등해결 방안으로 간주했다. 전쟁 자체가 엄청난 국력과 인명의 희생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통찰한 결과다.
《관자》의 이런 군사사상은 후대의 병가뿐만 아니라 법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국시대 중기 상앙(商鞅)이 농사지으며 싸우는 농전(農戰)을 통해 서쪽 진나라를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 그 증거다. 기원전 348년, 상앙은 기존의 전제(田制)를 폐지하고 새로운 부세법(賦稅法)을 실시했다. 이는 농지의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획기적인 제도였다. 부세법은 모든 전답을 국유로 정했다. 규정을 어기거나 속임수를 쓰는 자가 있으면 토지를 몰수당했다. 정령의 반포와 군사이동의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방으로 길을 뚫고, 징세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도량형의 기준을 정했다. 이때 부피를 재는 두(鬥)와 통(桶), 무게를 재는 권(權)과 형(衡), 길이를 재는 장(丈)과 척(尺) 등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시장질서의 공정성 확보와 경제규모의 확대를 통한 부민부국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매우 시의적절한 조치였다.
당시는 촌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집단노동을 하던 농민과 노비들이 점차 개인노동을 위주로 하는 경제활동의 기본 단위로 변환하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혁신적인 조치 덕분에 농민들은 일정한 경지를 분배 받은 뒤 임의로 경작지와 휴경지로 나누어 경작하는 방식으로 증산을 꾀할 수 있었다. 이후 농사와 길쌈을 결합한 일부일처의 가정이 생산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이를 호(戶)라고 했다. 상앙은 호를 기준으로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모든 남자는 농사를 짓고, 모든 여자는 길쌈을 해야 하는 법규가 등장했던 이유다. 이는 생산의 비약적인 증대를 가져왔다.
이처럼 상앙은 변법을 배경으로 생산증대를 독려했다. 변법이 초래한 효과는 엄청났다. 진나라 백성은 전쟁이 나면 부귀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고 서로 축하하고 자나 깨나 전쟁이 일어나기를 노래했다. 덕분에 해마다 국고 수입이 100여만 금에 달하게 되었다. 상앙은 농한기를 이용해 백성을 쉼 없이 훈련시켰다. 백성 모두 전쟁에 나가서는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는 전사가 되었다. 진나라가 최강의 병력을 보유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병가와 상가
상가는 제자백가 가운데 매우 특이한 위치에 서 있다. 도가와 유가 등의 통치이론은 난세에 활용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패망을 자초할 공산이 크다. 지극히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법가와 병가 역시 성세에는 효용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무(武)보다는 문(文)이 더욱 중시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상가의 부민부국 사상은 난세와 치세를 막론하고 두루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 제자백가 사상과 구별된다.
관중이 《관자》 〈목민〉에서 제시한 ‘예의염치(禮義廉恥)의 문화대국’이 치세와 난세를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국가목표로 작동하는 이유다. 방법론 또한 매우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부국강병의 최종 목표는 문화대국의 건설이다.
나라의 부강은 오늘날에도 증명되듯이 서민경제의 충족에서 비롯된다. 공자보다 100년가량 앞서 활약한 관중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고루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중농주의가 아닌 중상주의를 추구했던 이유다. 실제로 그는 일련의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우두머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자는 이를 높이 평가하며 관중의 부민부국 이론에 공명했다. 《논어》 〈헌문(憲問)〉의 다음 구절이 그 증거다.
“관중이 생전에 제환공을 도와 제후들을 호령하는 패업을 이루고, 일거에 천하를 바로잡는 대공을 세운 덕분에 지금까지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여불위가 활약하는 전국시대 말기만 해도 중상주의가 중농주의를 압도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꽃을 피운 것이나 다름없다. 사마천이 상가 이론을 집대성하면서 〈화식열전〉에 수많은 부상대고를 소개해놓은 이유다. 사마천은 중상의 중요성을 이같이 역설했다.
“사람들은 각기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하여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싼 것은 장차 비싸질 징조이며, 비싼 것은 싸질 징조다. 적당히 팔고 사며, 각자 생업에 힘쓰고 일을 즐기는 것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다. 물건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모여들고, 강제로 구하지 않아도 백성이 그것을 만들어낸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가 이미 수천 년 전에 사마천에 의해 논파되었던 셈이다. 경제학의 효시를 꼽는다면 사마천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옳다. 사마천이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춘추시대 이전부터 중상주의 흐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한무제가 유학을 유일한 관학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선언한 이래 역대 제왕이 하나같이 도덕을 최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던 것이 그렇다. 모든 왕조가 통상적인 평세를 태평성대의 성세로 미화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실제로 당태종 때의 정관지치(貞觀之治), 청조 강희제에서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제외한 여타의 성세는 관학을 장악한 유가가 의도적으로 미화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주(西周) 초기 주성왕과 주강왕 시대의 성강지치(成康之治)를 비롯해 전한 초기 한문제와 한경제 때의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성세로 미화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경십서 1권 해제 - 제자백가와 병가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