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발분지설 (發憤之說)
사마천이 태사령이 되어 궁중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맡고 있을 때, 이릉이라는 장수가 흉노족 정벌에 나섰던 일이 있다. 이릉은 보병 5천으로 흉노의 8만 대군과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적의 화살에 상하고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이릉이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보고 죄로 다스리려고 했다.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이릉을 변호하려는 자들이 없지 않았으나 화가 미칠까 두려워 차마 그런 의견을 내어 놓지 못했다. 태사령 사마천이 감히 나서서 이릉의 패인을 분석하고 나아가 흉노족에 대한 정책을 비판했다. 태사령의 바른 소리에 대로한 무제는 태사령 사마천의 목을 베게 했다.
당시의 형법에 따르면, 사마천이 죽음을 면하는 방법은 다섯 가지 형벌 중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로 알려진 궁형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오형이란, 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자자형, 코를 베어 버리는 의형, 발뒤꿈치의 아킬레스 힘줄을 자르는 월형, 자지를 자르는 궁형, 목숨을 빼앗는 대벽형, 이 다섯 가지 형벌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형인 대벽형을 면하는 길은, 그 아래 단계의 벌인 궁형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궁형이 대벽형보다 가볍기만 한 벌인가? 많은 선비들은 궁형을 받고도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실제로는 대벽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형을 면하자면 궁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궁형을 면하자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50만 전의 속량금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난한 태사령 사마천에게는 그런 돈이 없었다.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당하면서까지 죽음만은 피하기로 작정한 것은 그로부터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역사 기록하는 직분을 맡고 있던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풍토를 한탄하면서 아들에게, 자기가 다하지 못한 일의 뒤를 이어줄 것을 간곡하게 유언한 바 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직후에, 하늘을 찌를 듯한 분기(憤氣)를 누르고 단호하게 자기 결심을 밝힌 글을 발분지설 (發憤之說)이라고 하거니와, 난국에 한번 되씹어 볼 만하다.
옛글에서 문자가 간략했던 것은 쓴 이가 심중의 뜻을 이루려 마음을 다잡고 분기했기 때문이다. 옛날 주나라 문왕은 유리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분기함으로써) 『주역』을 지었고,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면서도 (분기함으로써)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초나라에서 강남으로 쫓겨나가서도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먼 다음에도 國語를 지었다. 보라 손빈은 다리를 잘리고도 『손자병법』을 찬술하였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귀양 가고도 『여씨춘추』를 남겼다. 이들은 모두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낼 방법이 이것 밖에는 없어서 앞날에다 희망을 걸어 본 것이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옥을 오로지 분기로써 누르고 10년 동안 요순시대부터 한무제까지 2천 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하니 이것이 한문 문화권 문학의 거대한 남상 (濫觴) 노릇을 해왔고, 역사 기록의 전범 (典範)으로 꼽히는 『사기』다.
이윤기『무지개와 프리즘』생각의 나무, 2002
에너지보존의 법칙 : 에너지는 새로 생성되거나 소멸될수 없다는 물리법칙이라기 보다는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같지만 에너지는 매 순간마다 다르게 변화하며, 생성 소멸을 반복한다는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역사 속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창조의 에너지로 변화시켜 명품을 탄생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