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도운 재상들 (상앙, 범수, 채택, 여불위, 이사)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최고의 중국통일을 한 진나라에는 좋은 왕들도 있었지만 좋은 재상들이 있었습니다. 통일을 기원전 221년에 이루었으니 상앙으로 시작해서 100년 넘게 좋은 재상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좋은 재상들은 모두 다른 나라 출신들입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지고 뒤처진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기초를 만든 상앙, 원교근공의 외교로 진나라를 천하통일에 다가가게 한 범수, 월만측휴 (달도 차면 기운다)를 말한 채택 그리고 진시황제를 키워준 여불위 그리고 통일을 달성한 이사.
5명의 재상들은 자신들만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도 역사에 남을 아주 강한 스토리들입니다. 그리고 범수와 채택만이 천수를 누립니다.
상앙(商鞅,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38년)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유학자이자 법가를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은 희, 씨는 공손, 이름은 앙이다.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생전에는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오가작통법 (5집이 서로를 감시함)의 창시자였으며 당대에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노비 제도의 폐지를 동양 최초로 제창하기도 하였다.
부국강병의 술책으로 진효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대량조로 승진하여정치개혁의 총설계자가 되었다. 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진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 저서로는 《상군서》29편이 있으며, 병법 지식도 박식하여 병서(兵書)인 《공손앙》27편을짓기도 했다.
범수
'원교근공'이란 고전적이고 불멸의 외교이론을 창안하여 진의 통일을 촉진했던 범수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진 소양왕 시대에 활약했다.
그는 사지에서 간신히 살아나와 사방을 떠돌다 진나라에 정착하여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헤치고 입신양명한 범수는 원교근공이라는 고차원의 외교모략으로 합종책을 철저히 분쇄하고 마침내 천하통일의 마지막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장평전투를 통해 처절하면서 장엄하게 분열시대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범수는 명예로운 퇴장을 선택하여 전국시대 유세가로는 보기 드물게 생의 막바지를 편하게 마무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수 [范睢] -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창안자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 10. 20., 도서출판 들녘)
채택
연나라 사람으로 고향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진나라에 들어와 재상이 되어 출세한 인물이다.
채택은 공을 세운 후에는 물러나는 것이 최상의 도라고 재상인 범수를 설득하여 물러나게 한 후 재상이 되었다. 후에 그도 스스로 물러나 평안한 말년을 보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월만즉휴(月滿則虧)의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를 바꾼 거상(巨商) 여불위
중국이라는 나라가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등장하게 된 시점은 진시황의 '통일 국가 건설' 이후였다. 진시황의 통일 이전,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각각 다른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진 수많은 국가들로 뒤엉켜 있던 대륙에 불과했다. 진시황의 통일은 이렇듯 중국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이 어떻게 준비되었고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마다 각각 다르다. 진나라 효공과 상앙의 변법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고, 순전히 진시황의 영웅적인 활동과 기개에 의해 통일이 가능했다고 보는 역사가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가능하게 한 실제 기반은 여불위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불위는 진(秦)나라 태자의 서자에 불과했던(더욱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자초(子楚)를 자신의 막강한 재력(財力)을 이용해 진나라 왕(장양왕)으로 만들었다. 또한 불과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시황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기간에, 진나라를 정치·군사는 물론 경제·문화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전국시대 최강대국으로 만들어놓았다.
진시황과 여불위
여불위는 자초(子楚)가 조나라에 볼모로 있던 시절 자신의 애첩을 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진시황이다. 이로 인해 여불위는 진시황의 생부(生父)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의 기록이고, 정사(正史)의 기록에 진시황은 자초(子楚 : 장양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 일등 공신 역할을 한 여불위는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장양왕이 왕이 된 지2년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나자, 13세 어린 소년인 진시황을 대신하여 진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라고 부르며 아버지처럼 떠받들었다. 진나라의 실권은 여불위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성년이 되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자,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여불위를 가장 먼저 제거해버렸다. 진시황 자신의 정치적 야심과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서,강력한 권력을 손에 쥔 여불위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모친인 태후와 간통한 노애의 반란 사건을 빌미 삼아 여불위를 축출하고 자살에 이르도록 했다.
만약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고 한다면, 진시황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천인공노할 대죄를 지은 셈이다.
문화강국의 꿈 : 『여씨춘추(呂氏春秋)』
전국시대 말기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진(秦)나라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나 사상 면에서는 위(魏)나라·초(楚)나라·조(趙)나라·제(齊)나라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천하에 이름깨나 알린 사람이나 학자들은 모두 전국시대의 4군자(四君子 :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나라의 평원군, 제나라의 맹상군) 문하의 식객이 되어 그들 나라의 문화와 사상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진나라가 문화·사상 면에서 그들만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무식한 놈이 힘만 앞세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여불위는 천하의 선비와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진나라에 학식과 문재로 넘치는 인물들을 불러들였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이때 그의 문하에 모인 식객이 3천 명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李斯)가 진시황에게 등용된 것이 여불위의 추천에 의해서라고 한 것을 보면, 이사 또한 이때 여불위를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는 자신의 문하에 모인 식객들을 총동원하여 야심찬 문화 사업을 펼쳤는데, 그것이 바로 『여씨춘추』의 편찬이다. 여불위는 이 책에 천하의 모든 학문과 사상·이론을 총망라하여 담았다.여불위는 식객들이 저술한 방대한 기록과 문헌을 모아 '12기(十二紀)·8람(八覽)·6론(六論)'으로 나누어 정리한 후 "글자 수가 20여만 자에 이르고, 천지와 만물, 고금의 일들을 모두 완벽하게 서술했다"고 하여 책의 이름을 '여씨춘추'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의 저잣거리에 이 책을 펼쳐놓고,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여불위의 『여씨춘추』 편찬사업은, 진나라가 정치 군사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 면에서도 통일 국가를 세우고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췄음을 천하에 알린 사건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사 속으로 - 문화강국을 꿈꾼 여불위 (2천 년을 살아남은 명문(名文), 2006. 7. 27., 포럼)
이사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다. 죽은 해는 기원전 208년이다.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상채(上蔡, 지금의 하남성 상채 서남) 사람이다. 그는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는 데 모략과 정책을 제시하여 진 제국의 건립과 중국의 대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인품은 바르지 못했다. 그는 명리를 좇았고, 이익 앞에서 의리를 잊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조고(趙高)에게 매수되어 진 2세 호해(胡亥)를 위해 옳지 못한 일을 저질렀으며, 끝내는 조고의 모함에 빠져 자신의 몸을 망치고 말았다. 이사가 일생 동안 어떤 잘잘못을 했든 간에 그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정치모략가였다는 사실만큼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사 [李斯] - 객(客)을 내치지 말 것을 호소하고, 분서(焚書)를 시행하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2005. 10. 20., 도서출판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