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칭기스칸 사후 (원의 탄생과 4개의 칸국)
칭기스칸 사후 몽골제국은 분열을 하게 됩니다. 장자에게 대칸자리를 물려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장자 주치는 출생에 대한 의혹이 있습니다. 장남인 주치가 칭기스칸의 아내, 보테르가 볼모를 잡혔을 때 임신을 했다는 의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장남이 후계자가 아니니 꽁까루 집안이 됩니다. 조선초기에 고조 이성계 장남이 왕 자리를 거부하는 바람에 난리가 벌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장남이 왕이 되었다면 이방원이 난리를 부리지는 않았을텐데 일은 다 자신이 하고 이복동생에게 왕 자리를 주게 되었으니 이방원이 속에서 열불이 낳을 겁니다.
칭기스칸의 3남인 오고타이 집안과 칭기스칸의 막내였던 톨루이 집안은 몽골제국 초기에 대결을 벌리게 됩니다. 2대와 3대칸은 오고타이 집안에서 그렇지만 4대와5대칸은 톨루이 집안에서 나오게 됩니다.
징기스칸의 사후 쿠릴타이에서 몽골 족장들은 톨루이를 새로운 대칸으로 선출하였지만, 톨루이는그것을 거절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그의 형 우구데이에게 양위하였다. 몽골 족장들은 막내 아들이아버지를 계승한다는 전통에 따라 이와 같이 결정하였으나, 톨루이가 당시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톨루이보다 그의 네 아들로 이루어진 톨루이 가문 사람들은 몽골 제국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은 몽케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 부케였다. 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고, 쿠빌라이는 5대 황제가 되었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가했던 맹장들입니다. 장남이 후계자가 아니기에 서로 엄청난 경쟁을 하게 됩니다. 항상 차남들은 착한가 봅니다. 둘째인 차카타이는 일단 멀리 떠납니다. 그리고 장남은 더 멀리 떠납니다. 그리고 남은 3째와 막내인 툴루이가 남았는데 힘이 더 좋았던 막내가 아주 멋있게 형에게 양보합니다. 그 사람이 오고타이 2대칸입니다.
그렇게 2대를 내려왔는데 후계자를 억울하게 빼았겼던 장남의 차남인 바투가 3남인 오고타이의 아들인 귀우크에게 무시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바투는 나중에 양보를 했던 막내삼춘의 아들인 몽케를 도와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일은 꼬이게 됩니다. 사촌끼리의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몽골사람들이 유목인이라서 그런지 강한 리더가 등장하면 모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해체를 하나 봅니다. 그렇지만 한번 강성해지니 꽤 오래 버팁니다.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는 킵차카 칸국 (러시아), 차남 차카타이는 차카타이 칸국 (우즈베키스탄), 3남 오고타이의 후손들은 오고타이 칸국을, 송나라를 정복한 툴루이의 아들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거점으로 원나라를 세웠고, 쿠빌라이 칸의 동생인 훌라구 칸은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일 칸국을 세우게 됩니다.
서로 대결하였기에 칸국들은 오래 유지되었지만 서로 교류가 없어서 큰 발전은 없었던 것 습니다. 원나라가 망한 후에도 원은 북쪽으로 올라가 꽤 오랫동안 유지를 했고 칭기스칸의 아들들이 만들 4개의 칸국도 몇백년씩 유지를 합니다.
바투의 찹카차 칸국은 러시아를 오래동안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남부에는 우리처럼 생긴 우랄알타이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서양에 알렉산드로스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칭기스칸인데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문화를 동쪽으로 융화시켰다면 칭기스칸은 동양의 문화를 유럽으로 수출했습니다.
제1대 대칸 칭기스칸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제2대 대칸 오고타이칸 또는 우구데이
오고타이 칸(1186년 ~ 1241년)은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이다. 휘는 보르지긴 오고타이. 몽골의 황제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부족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영토를 나누어 받아 오고타이 한국을 열었다. 1229년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 개혁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자신의 몫으로 영지가 분배되었으나 그는 실질적으로 오고타이 한국을 통치하지는 않았다.
칭기즈 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오고타이는 거처를 카라코룸에 정하였고, 그가가장 신임한 인물은 야율초재로 아버지 칭기즈 칸 때부터 통치의 조력자로 함께 해왔으며, 중국식행정 조직을 구성하여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정복 사업을 펴 페르시아와 남러시아를 정복하고 고려를 쳐 다루가치를 설치하는 등 영토를 넓혔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제3대 대칸 귀위크칸
귀위크 칸 (1206년 ~ 1248년)은 몽골 제국의 3대 대칸으로 1246년부터 124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우구데이 칸의 장남이었다. 휘는 보르지긴 귀위크. 겁이 많고 힘이 약하였으나,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 정치면에서는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귀위크는 우구데이와 그의 6번째 부인 퇴레게네(황후)와의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나 메르키트 부의오굴 카이미쉬와 결혼했다. 우구데이는 대칸으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영지인 중앙아시아 Emil-Qobuq 지역을 귀위크에게 줬다. 귀위크는 1233년에는 포선만노가 랴오둥 반도에 세운 대진국을 정복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
제4대 대컨 몽케 칸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귀위크 칸의 사촌동생이기도 하고 쿠빌라이 칸의 형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톨루이이며 어머니는 소르칵타니로 그의 형제는 쿠빌라이, 아리크 부케, 훌라구 등이 있었다.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다.
1251년 툴루이계의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자 시레문(失烈門)을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대칸의자리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금세 발각되어 음모의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여러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귀위크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 등이 숙청당했다.
1255년 훌라구는 몽케의 명을 받들어 대군을 이끌고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정복에나섰다.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 몽골족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할것을 강요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가 거부했다. 그는 수십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진격하여1256년 12월 알라무트의 아사신 근거지를 파괴하고 거침없이 바그다드로 쳐들어갔다.
바그다드를 포위하자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자비를 구했으나 소용없었다. 1258년 2월 10일 훌라구는 이슬람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슬람군이 무장해제함과 동시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여 거의 8만명의 바그다드 이슬람교도가 학살당했고 칼리파 알 무스타심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압바스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1259년 고려를 항복시켰다.
이윽고 1259년 몽케 칸의 친정군이 남송으로 원정하였다. 남송의 장군 가사도는 쿠빌라이의 군대를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때 가사도가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황제 몽케의 사망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막내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 : 훗날의 상도)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 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제5대 대칸 원세조 쿠빌라이 칸
(元 世祖 1215년 9월 23일 ~ 1294년 2월 18일)은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재위 : 1260년 ~ 1294년)이자 원의 초대 황제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쿠빌라이
1279년 남송을 정벌하여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제후국으로 편입하고,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케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한다.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멸망시키고 중국을 정복하였으며, 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중앙 아시아 출신 등 다양한 인종을 실력 위주로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기원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또 한편, 대칸에 즉위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고려 원종과 모종의 동맹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들인충렬왕을 사위로 맞으면서 고려와 특수관계를 맺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의 넷째 아들이며 몽케 칸의 동생이었다.
1251년부터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이때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정벌을 맡겼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경조(산시성) 시안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에 있던 대리국을 먼저 침공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1253년가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을 정복했다. 그러나 정복 직후인 1254년 초 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들을 감지하고 되돌아가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에게 이 지역의 위수를 맡겼다. 대도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7년 몽케 칸의 지휘 아래출정에 참여하여 남송 공략을 준비하였으나 1259년 몽케가 갑자기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몽케 칸의 전사 소식과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크 부케가 스스로를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복귀하였다.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Kuriltai, 大會議)를 임의로 개최하여 몽골족 부족장들을 소집, 그해 5월 5일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아리크 부케 역시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고 쿠빌라이를 찬탈자라 공격하였다. 후에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시비, 논란은 그의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까지 날조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거절하고 끝까지 항거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었다.
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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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개시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과 티베트를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계속 된 정벌과 정복 사업의 강행으로 젊은 장정들이 사라져 노동력이 황폐해졌고, 군비 조달로 인한 재정난의 증대는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인들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는데, 이슬람교도 출신 서역 상인들과 위구르인 상단 등 주로 색목인(色目人) 계통의 상인들의 중국 진출을 허용함과 동시에 이들 색목인 출신 신흥 관료를 발탁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와 그의 사주를 받은 두아 등 한국의 리더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79세를 일기로 대도에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과 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용인술에 뛰어났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