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7: 공자의 선부후교
공자에게는 4명의 아주 특별한 제자가 있습니다.
안회: 공자도 존중하고 제일 좋아했던 그러나 가난했던 그리고 단명까지
자로: 공자와 나이 차이도 제일 적고 편했던 제자였지만 성격이 급해서 항상 걱정을
자공: 상업적으로 성공해 공자님의 천하유세를 도왔고
자유: 정치적으로 재능이 있었고 아주 말을 잘해서 외교를 잘했다고 합니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부민부국 이론이다.
〈자로〉에 따르면 당초 공자는 천하유세를 떠나면서 가장 먼저 지금의 하남성 낙양 인근에 위치한 위(衛)나라를 택했다. 위나라는 비록 약소국이기는 했으나 중원의 한복판으로 사방으로 길이 뚫려 있었던 까닭에 상업교역이 매우 활발했다. 당시 공자의 제자 염구가 수레를 몰았다.
자가 자유(子有)인 염구는 노나라 출신으로 공자보다 29년 연했다. 정치에 재능이 많았던 까닭에 한때 노나라 권신인 계강자(季康子)가 그를 불러들여 집사로 삼았던 적도 있다. 그는 어떤 길을 택하기 전에 항시 예상되는 이익을 냉정히 저울질했다.
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승산 없는 전쟁에도 기꺼이 몸을 던진 자로와 늘 대비되어 거론되는 이유다.그는 부국강병의 계책에 관한 한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비록 공자 밑에서 학문을 닦기는 했으나 거만의 재산을 모은 자공과 마찬가지로 상가 이론에 크게 경도된 인물이었다.
공자가 천하유세에 나서면서 그에게 수레를 몰게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공자는 교역을 위해 위나라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내 염구를 돌아보면 감탄조로 말했다.
“백성이 참으로 많기도 하구나!”
염구가 물었다.
“백성이 이처럼 많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우선 부유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미 부유해졌으면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르쳐야 한다.”
공자사상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선부후교(先富後敎)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공자는 생전에 학문과 덕행을 닦은 군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고대했다. 공자의 학문을 군자학(君子學)으로 요약하는 이유다. 염구의 질문에 위정자는 부민을 달성한 후 반드시 교민(敎民)을 행해야 한다고 답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부민이 전제되지 않는 한 교민은 성공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것이나 다름없다. 관중의 부민부국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관자》 〈목민〉의 해당 대목이다.
“나라에 재물이 많고 풍성하면 먼 곳에 사는 사람도 찾아오고, 땅이 모두 개간되면 백성이 안정된 생업에 종사하며 머물 곳을 찾게 된다. 창고가 가득 차야 백성이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알게 된다.”
여기서 예절은 곧 예의염치를 말한다. 나라를 온전하게 하는 요체는 예의염치를 아는 지례(知禮)에 있고, 지례의 핵심은 창고를 채우는 실창(實倉)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창의 경제대국만이 지례의 문화대국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던 셈이다.
나라의 부강은 오늘날에도 증명되듯이 서민경제의 충족에서 비롯된다. 공자보다 100년가량 앞서 활약한 관중도 공자와 마찬가지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고루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중농주의가 아닌 중상주의를 추구했던 이유다.
실제로 그는 일련의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우두머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공자는 이를 높이 평가하며 관중의 부민부국 이론에 공명했다. 《논어》 〈헌문(憲問)〉의 다음 구절이 그 증거다.
“관중이 생전에 제환공을 도와 제후들을 호령하는 패업을 이루고, 일거에 천하를 바로잡는 대공을 세운 덕분에 지금까지 백성이 그 혜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