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턴

thelum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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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한파가 기승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작업실에서 밤 열시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집에 가려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작업실 건물의 경비실 아저씨는 쓸데없는 전력 낭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신지 비상등을 제외한 복도의 모든 불을 항상 꺼놓으신다. 야밤의 주차장이라고 해서 밝을 리가 없다. 주차장에 항상 켜놓는 희미한 전등 하나마저 벌써 소등되어 있었다. 껌껌했다. 시동을 걸고 차가 예열될때까지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헤드라이터를 켜고 기어를 드라이브에 위치시킨 후, 주차장 입구 쪽을 향해 운전대를 틀면서 천천히 우웅- 엑셀레이터를 밟는데


좆됐다

...



뭔가 퍼억 - 하는 소리가 난 거 같았다. 미세한 진동이 몸으로 느껴진것 같기도 했다. 여튼 아무 일도 없었기를 바라는 내 소망과는 달리 무슨 일이 벌어진 것만은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차에서 내려 상황을 파악했다. 깜깜해서였는지 내 옆에 주차되어 있던 차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그만 박아버린 것이다. 옆 차의 피해상황을 보니 이건 뭐 살짝 긁힌 정도가 아니라 움푹! 들어가있지 않은가? '씨발 좆됐다' 라는 표현을 일생동안 딱 세 번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 아낌없이 두 번을 연거푸 뱉어버렸을 정도로 그야말로 멘붕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몸 속에 숨어있던 어떤 본능이 작동된 것일까? 내 이성과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들이, 마치 이런 순간을 위해 수없이 연습해본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스스로의 몸짓을 넋 놓고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360도로 눈알을 바삐 돌리며 목격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젠장, 전방 오 미터 앞, 어둠 속에 경비실 아저씨가 계시지 않는가.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 쪽을 자세히 주시해보니, 경비아저씨는 주차장 바닥 관련한 시끄러운 작업을 바쁘게 하고 계셔서 내 쪽의 상황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로 눈알을 돌렸다. CCTV가 주차장에 혹시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세 번째 눈알돌림은 피해차량에 블랙박스가 없음을 확인하는 데에 쓰였다. 이 모든 과정들은 단 3초만에 이뤄졌다.


바로 그때 잠깐 잠들어있던 이성이 잠깐 뿅! 하고 작동했다. 에이, 목격자가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그냥 튀면 안 되지! 하며, 차주의 전화번호를 확인하려고 피해차량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전화번호가 없지 않은가. 아 뭐야 이거, 난 전화해서 사죄하고 변상하려고 했었는데... 번호가 없잖아? 번호가 없는데 어떡해? 하하하 번호가 없다! 번호만 있었어도! 히히히히. 이성은 다시 작동을 멈추고 본능이 되살아났다. 이거 진짜 완벽 범죄다.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차를 타고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탓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유전자 탓인 것 같다. 몇만 년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에는 '뻉소니 유전자' 라는 게 분명 있어왔을 것이다. 뺑소니를 능숙하게 했던 생명들이 자연선택을 받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했으며, 결국 현재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 틀림없다. 뺑소니 유전자는 지구의 다섯 차례 대멸종 시기에서 살아남았으며, 현재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자신을 번식하고 있다. 그리고 나처럼 적당한 상황이 도래했을 때 유전자 스위치가 'ON'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찰나의 시간에 마치 연습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빠른 상황파악과 처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뉴스 보면서 뺑소니 했던 사람 욕하지 말아야지. 그 사람도 나 같았을 거야. 착한 사람인데, 유전자가 갑자기 스위치 온이 된 걸 가지고 뭘 어떻게 해?


다시 이성이 작동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 진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리차드 도킨스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다른 자연 생명과 다른 점은 문화유전자인 '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아닌가?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부조리한 사회와 비인간적인 도시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그림을 그리고 난 후, 주차장으로 내려와 뻉소니를 치고 도망간다? 아아, 이러고 나면 내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벌써 출발한지 10분이 흘렀고 전방에 보이는 내부순환도로를 올라가버리면, 오늘 일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유전자'와 '밈'과의 힘겨운 싸움이 지속되었다.


내부순환도로가 눈 앞에 가까워졌다. 호흡을 가다듬자 눈빛이 반짝였다. 그 순간 액션영화의 자동차 추격 씬에서나 나올법한 우아한 동선을 그리며, 끼이이이이익 소리와 함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유턴을 했다. 아마 0.7초 정도가 걸린 재빠른 유턴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돌아갔다. 다음날 내 통장 잔고에서 삼십만원이 빠져나갔지만, 종로구 홍은 사거리 바닥에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thelump 유턴'이라고 불리우는 빛나는 바큇자국을 아직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thelump@thelump



유 턴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