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판에 박힌 이미지가 있다. 좁고 어두운 골방에 붓을 들고 앉아 창문으로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을 보며 불현듯 영감을 떠올리고, 부스스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으로 온종일 어지러운 방에서 창작에 몰두하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반사회적이고 예민한 성격에 조미료로 조울증 비스무리한거 하나 정도는 첨가해줘야 안성맞춤이다. 이처럼 고독한 천재 예술가의 이미지는 적어도 한 세기 전에 시대적인 유효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건한 관념으로 남아있다. 동시대 예술가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관심과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운 고정된 예술가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21세기 동시대 예술가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국가와 기업에서 공모하는 각종 지원 사업에 합격하기 위해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그럴듯한 기획서와 예산을 작성하는 모습? 심사위원 앞에서 유려한 말솜씨로 프리젠테이션하는 모습? 생계유지를 위해 여기저기 알바를 뛰다가 문득 지갑 속에 꺼낼 일 없이 고이 모셔놓은 <예술인 패스> 카드를 발견하며 아, 맞다 나 예술인이었지? 라고 자문하는 모습? 역시 인터넷 시대에 돌파구는 SNS밖에 없어! 라면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스타가 되기 위해 꾸준히 작품 이미지를 적당히 재치 있는 멘트와 섞어 업로드하며 늘어가는 팔로워와 좋아요를 관리하는 모습?
요즘엔 정말 그림과 밀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제야 진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요. 이제야 좀 알겠어요. 진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저는, 이제야 깨닫고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진짜로요. 진짜예요, 라며 흥분된 눈빛으로 붓질하는 내 앞의 홈커밍보이는 확실히 고전적인 예술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1200점, 이라고 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직 학부생에 불과한데? 나는 되물었다. 1200점이요? 네. 대학교 들어와서 그린 작품이요. 아마 캔버스 작업만 900점 정도 될 겁니다. 학교의 모든 작품 보관함과 저의 방 하나가 그림으로 가득 쌓여 있어요. 이제 더는 둘 곳도 없죠.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줄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발표할 수 없어요. 이미 지나간 작품들이고, 제 그림은 변했기 때문이에요.
작업량이 작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겠지만, 작업을 대하는 태도, 즉 작가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지표로써는 작용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작업량이다. 내가 직접 알고 있는 모든 작가를 떠올린다고 해도 유례없는 수치다. 먹고 싸는 시간 빼고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숙연해졌다. 애초부터 경험과 나이를 빌미로 ‘예술계 선배’의 관계로 그에게 다가갈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먼저 입봉한 같잖은 선배의 포지션으로 빙의되어 그에게 꼰대 같은 발언을 내뱉지는 않을지 다시금 스스로를 경계했다.
압도적인 작업량, 더러운 작업실, 반사회적 성격(스스로 고백했듯), 젊은 나이에다가 수려한 외모까지 홈커밍보이는 시청자가 요구하는 판에 박힌 고전적인 예술가 이미지를 모두 충족하는 방송 다큐멘터리 소재로 충분했다. 그런 면에서 말로만 들어봤을, 아니면 책이나 티비에서나 볼 법한 존재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문득 졸업 이후의 홈커밍보이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개인전을 하고 이력을 점차 쌓겠지. 지금처럼 매일 그림만 그리겠지. 여전히 머릿속에는 그림밖엔 없겠지. 그런데 그걸로 충분할까? 괴물같은 작업량과 열정으로만 미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작업이 짱이면 작가도 짱이 될까? 내가 체감한 세상으로는 부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밖에 없다. 그의 미래도 나의 미래도 아닌 어쩌면 우리 모두의 미래일 것이다.
여전히 제대로 굴러가는 미술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겠고, 때문에 행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작품 판매라는 것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하는 연중행사가 될 것이며, 끊임없이 공고되는 각종 지원사업에 응모하고 떨어지고 응모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작업이 아니라 세련되게 지원서 쓰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어쩌면 일 년 내내 지원서만 쓰는 인생에 강한 회의감을 품으며, 어느 달 밝은 밤 한강에서 깡소주를 들이마신 채 마포대교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불길한 기운이 솟아오르는데..
캔버스 너머로 뭔가를 그렸다가 다시 지우는 소리가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