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518 댄스필름 '봄날' 스틸 이미지
1 - 기획 - 『광주 518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 댄스필름 × 소년이 온다
2 - 구상 - 『맛있는 고기를 찾아서』 : 레퍼런스 보유하기
3 - 섭외 - 『감독하지 않는 감독』 : 수화통역사와의 만남
4 - 헌팅 - 『비굴한 장소 사냥꾼』 : 애원하고 삥뜯기고5 - 촬영 - 『말라붙은 분수대와 길잃은 풍선』 : 무용수와의 촬영
6 - 편집 - 『4번째 시공간』 : 도시가 기억하는 5.18
7 - 홍보 - 『누가 봐줄까?』 : 예고편과 포스터 공개
8 - 상영 - 『봄날 온라인 상영』 (스팀잇에 한해서 5월 17일부터 5일동안)
촬영을 위한 스케치
노 다이얼로그
신데렐라는 열 두시 이전에 귀가해야 한다는 명을 받았지만, 나는 반대로 한동안 열 두시만 되면 몽유병 환자처럼 집을 나서곤 했다. 아무도 없는 도시의 밤 산책을 즐겼다. 날 매료시킨 풍경은 스펙터클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 가에 내놓인 스티로폼 묶음, 덮개로 씌워진 오토바이, 바닥의 하수구 뚜껑 따위였다. 공통점이라면 분명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지나치기 좋은 사물이다. 그런데 밤에는 그 존재를 은은히 드러낸다. 어떤 것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렬하기까지 하다. 말 없는 사물이 말을 걸어올 때면 삼각대를 설치하고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말 없음'을 내가 선호하는 줄은 몰랐다. 여태까지 연출했던 영상을 돌이켜봤다. ≪쇼팽이미지에튀드≫, ≪강정 오이군≫, ≪덩어리≫, ≪블라인드 필름≫, ≪봄날≫, 그리고 현재 작업 중인 ≪보이지 않는 도시≫.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사가 없는 영상이다. "저는 평소 인간의 언어를 불신했어요. 이미지 자체가 갖는 힘에 집중하게 되었죠!" 라고 포장하며 의도치 않았던 구라를 칠 생각은 없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제껏 블로그에 너무 많은 '말'을 써 왔던 탓일까? 짠 것을 먹으면 벌컥벌컥 마실 물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어찌되었든 난생 처음 '모르는 사람'을 섭외해서 카메라 앞에 세울 일이 생겼는데도 나는 '말꾼'이 아닌 '춤꾼'을 택했다. 그냥 낮보다는 밤이, 소금보다는 물이, 말꾼보다는 춤꾼이 절실해서였겠지.
이선태 무용수
주차요원에서 말라붙은 분수대로 : 이선태
아이러니하게도 이선태 무용수(이하 호칭생략)는 '춤꾼'이 아닌 '말꾼'으로 처음 만났다. 작년 인디포럼 영화제에서 이선태는 어리숙한 주차요원 역할로 어느 단편 극영화에 출연했다. 깔깔대며 봤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선태 배우가 현대무용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이 번뜩였다. 무용수를 찾고 있던 나는 그대로 돌진해서 번호를 땄다. 며칠 후 영화제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잔을 들고 그의 옆에 앉았다. 연기의 칭찬을 늘어놓은 뒤에 본심을 꺼냈다. 어휴! 낯설고 어색한 나의 이 대담함! 이런 식으로 이성에게 대쉬했다면 연애 경험이 지금보다 두 배는 많았으리라.
꼬시기가 무섭게 그는 하겠다고 했다. 앗싸! '주차요원 말꾼'이 추는 춤이 잘 상상이 안 되었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를 찾기 위해 오디션 따위를 볼 여력이 없던 내 절실함이 곧장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보같은 동작을 선보였던 주차요원 배우가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9≫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안무를 선보였던 인기스타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게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그는 내게 과분한 피사체였다. 동작이 가장 크고 화려한 이선태에게는 그에 걸맞는 커다란 '내면의' 풍경이 필요했다. 강원도까지 찾아간 폐공장의 스케일은 그의 몸짓과 잘 어우러졌다.
이번 작업을 위해 같은 곡을 4명의 무용수에게 나눠주었고, 안무에 대해서는 ≪소년이 온다≫를 각자 읽으며 느낀 바를 "알아서 표현해주세요!" 라고 주문했을 뿐이었다. 하나의 기억이 하나의 감정으로 공유될 수 없듯이 예상대로 안무의 해석과 느낌이 무용수마다 달랐다. 이선태는 부드러운 곡선과 힘찬 직선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드라마틱한 안무를 펼쳤다. 그는 돌진하는 탱크가 되었다가 깨진 창문으로 변했고, 이내 말라붙은 분수대의 물이 되었다. 짧은 시간에 수 백가지 사물이 그의 몸이 되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분명 어리숙한 주차요원이었던 그였다.
김수진 무용수
갈 곳 잃은 풍선의 춤 : 김수진
김수진의 안무는 괴기스러웠다. 일반적인 댄스필름 장르에서 무용수가 추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독특한 몸짓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허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을 일관되게 취했다. 집요한 반복이다. 반복은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길거리 에어풍선을 떠올렸다. 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몸부림에 가까웠다. 갈 곳 잃은 풍선의 격렬한 몸부림이었다. 이선태가 다양한 사물이 되기를 시도했다면, 김수진은 반대로 속박된 사물에서 벗어나길 열망하고 있었다.
김수진은 이번 캐스팅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고 있었던 무용수였다. 2년 전, 내몰림과 폭력을 화두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기획하는 '창작집단 3355'에서 김수진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특정 시간, 어떤 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사람의 충분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촬영 날 길거리 씬을 찍을 때 김수진은 내몰림과 폭력을 오랜 시간동안 내면화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지을 수 없는 표정을 얼굴에 달았다. 섬뜩했다. 10년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열려진 대문으로 나간 것을 뒤늦게 알아챘을 때 그 날 목격했던 우리 엄마의 표정과 흡사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표현해주었다.
하이경, 천현아 무용수
충실한 비극의 재현 : 하이경과 천현아
하이경과 천현아는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중학생 동호와 그 친구를 염두에 둔 캐스팅이었다. 2인 안무를 짜야 했기 때문에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와 연습량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선태와 김수진이 두 겹 세 겹의 층위에서 자기 자신을 조망할 줄 아는 격렬한 몸짓을 보여줬다면, 하이경과 천현아의 안무는 비극의 재현에 충실한 느낌이었다. 자칫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는 동작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조차 그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이해했다. 모든 것을 헤아리는 양 연기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작위였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