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기 편하다

thelump(61)
Published in
#kr
Words
191
Reading
1 min
Listen
Play
8y



20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 작업으로 투쟁 현장에 연대하는, 투철한 액티비스트-예술가가 될 줄 알았다. 하얀 사각의 공간에 얌전하게 앉아있는 갤러리 미술을 혐오했다. 사회 문제에 전혀 관심없는 창작자들을 속으로 무시했다. 아무 대가없이 현장에 찾아가 억울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그들과 잠시나마 함께하는 내 모습도 아름다워보였다.


과거형으로 썼지만 여전히 같은 생각이다. 아니, '여전히 같은 생각이고 싶은' 생각일까? 사회의 부조리가 1개만 보였을 때는 내 분노와 공감을 쉽게 소비할 수 있었다. 100개가 넘어가니 뷔페 앞에서 뭘 먹어야 될지 모르는 아이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상황이 몇 년간 지속되니까 이제 모든 것들이 다 지겹다. 정의로웠던 나는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을 미워했지. 나도 다른 사람이 아니었어.


매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확인하는 피드에서는 억울한 사연들의 대잔치가 벌어진다. 당사자도 아니고 연대자도 아닌 나는 '피드에서나마' 그 감정들을 감당하기가 점점 부담스럽다. 읽어주는 것조차 부담스럽다는 내 모습이 가소롭다. 그게 무슨 큰 은혜라고.. 진심으로 그들의 투쟁이 승리했으면 좋겠고 아픈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사연들을 이제 몰랐으면 한다. 아니 조금만 알았으면 한다. 이미 조금만 알고 있긴 한데, 거기서 더 조금만 알았으면 한다. 내 인생을 통째로 내던질만한 커다란 서사를 획득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벗어나다니. 나는 세 발짝 물러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살기 편하다. 나는 살기 편하다.. 나는 살기 편하다...




slogo.jpg



나는 살기 편하다 | Ecency